110page

110 2026년 3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② 이준 열사의 생사관 이준 열사는 1859년 음력 1월 21일 함경남도 북청에서 무녀 독 남으로 태어났다. 5살 되던 1863 년 부모님을 모두 잃고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수학했다. 1887년 에 북청에서 초시에 합격 하여 순 릉참봉(純陵參奉)에 보직되었다. 1895년 6개월 만에 대한민국 최 초의 근대 법학 교육기관인 법관 양성소를 1회로 졸업하여 한성재 판소 검사보로 임명되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법조인이 되었다. 그러나 고관의 비행을 탄 핵한 일로 1개월 만에 면직되었다.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하 여 평의장 직을 맡았다. 만민공 동회를 조직하여 열강들의 침 략 계획과 부패한 정부를 비판 하고 백성들에게 호소했다. 반 대파들이 조작한 사건에 연루되 어 1898년 11월 4일 이상재(李商 在, 1850~1927), 남궁억(南宮檍, 1863~1939) 등과 반역 혐의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2월 에는 황국협회의 보부상계 회원 들이 독립협회에 몰려가 구타, 기 물 파손 등을 일으키는 사건이 발 생하여 군대까지 동원된 끝에 결 국 12월 25일 독립협회는 강제 해산되었다. 그 뒤로도 이준은 개혁당, 대한 보안회, 대한적십자, 공진회 등 의 애국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보 광학교, 오성학교 등을 창립해 교 육에 힘썼고, 법안연구회, 헌정연 구회 등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계 속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이 체결되자 격토문(檄討文)을 직 접 작성해 대한문 앞에서 상소문 을 낭독하여 투옥되기도 하였다. 1906년 국민교육회를 결성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 자 서울에 국채보상연합회의소를 만들어 모금 운동을 시작했으며 4월에 신민회가 결성되자 참여하 였다. 그 뒤, 특사의 임무를 부여 받고 헤이그로 향했다. 그리고 다 시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았다. 나 라와 공공의 정의를 위해 살았던 일생이었다. 당시 헤이그로 가던 중 상트 페 테르부르크에 체류했을 때, 현지 신문에 보도된 내용으로 이준 열 사의 풍모에 대해 단편적으로나 마 살펴볼 수 있다. ➑ ➑  헤이그특사가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한 프랑스어 호소문(독립기념관 제공) ➒  이준열사기념관의 헤이그특사 이동경로 전시판 ➓  이준열사기념관의 태극기로 덮인 침대(이상 필자 촬영 ) ➒ 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