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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 조선생 일군 순의비 요약
아아! 여기는 참판의 관직을 추증받은 조선생이 목숨을 바쳤고 부하 여러 동지의 유체가 묻혀있는 곳이다. 임진왜란에 전국이 적에게 유린됨을 보고 선생은 옥천에서 일아나 제가 전승업 김절등과 충청우도로 달려가 선비인 장덕필 신란수 고경우 노응탁및 참봉 이장륜등과 모의하여 의병1600명을 규합하고 7월 4일 공주에서 깃발을 올렸다. 8월 1일 승장 영규와 합세하여 적에게 빼앗겼던 청주를 수복하고 곧 임금이 계신곳으로 달려가려다가 다시 금산의 적을 토벌하게 되었다. 당초에는 관군이 합세하였으나 순찰사의 방해로 부하의 군대까지 흐터지고 겨우 7백명만이 남았다. 부장들은 진격을 반대했으나 선생의 충절에 감격하여 모두 따르게 되었다. 이에 앞서 호남의 권율군이 와서 협공하기로 하였는데 권율이 시기를 느추자는 제의를 미쳐 받지못하고 8월 18일 영규의 승군과 함께 금산 십리밖에 가서 권율의 응원을 기다렸다. 왜적은 후속부대가 없음을 탐지하고 총공격전을 개시했다. 선생은 '오늘은 죽음이 있을뿐이다. 다만 의에 부끄럽지 않어야한다'고 비장한 명령을 내리고 결사적인 전투를 감행하여 적의 공격을 세번이나 격퇴하였으나 마침내 화살이 없어져 적에게 패했다. 부장들이 선생에게 피하도록 권유하였으나 '남자가 죽을지언정 구차하게 살아서는 안된다'고 끝까지 독전하다가 한 한사람도 살아남지 아니하고 그대로 전사했다. 적군도 많은 사상자를 내어 시체를 수습하기에 사흘이 걸렸고 곧 다른곳으로 달아나 버렸다. 이로 인하여 호서 호남이 보호되고 국가는 오늘의 평화를 보게되었다. 선생의 전ㅅ를 듣고 정부에서 이조참판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를 추증하고 아들 완도는 태능참봉을 시켰다. 아아! 학자가 평소에는 큰 소리를 치다가도 자신에 해가 미치는 일에는 뒤로 물러서는 자가 많다. 선생은 과거에 글월을 올려 국정을 비판하고 간신을 물리치겠다하여 곧은 신하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제 국난에 생명을 바쳐 그의 충직을 증명하였다. 선생의 이름은 헌, 자는 여식이며 호는 중봉이다. 정묘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집이 가난하나 효성이 극진하였고 학문에 열중하면서도 꼭 실천을 앞세웠다. 순절한 이틀날 선생의 아우 범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움터에 가서 선생의 시체를 업고 옥천으로 옮겨갔다. 한꺼번에 전사한 의사 7백명은 모두 선생의 의기를 사모하며 감화를 받은 사람들로 충의를 위하여 일시에 목숨을 바친분들이니 이번 전란은 물론 과거역사에서도 드문일이다 그중 뚜렸한 사람은 장교로 활약한 이광륜 임정식 김절 이려 변계온 양응훈 과자방 김헌 강추서 강인서 박봉서 김희철 김인남 이인현 이양립 전원복 황삼양 박춘년 한기 박찬등과 선비로 종군한 박사진 김선복 복응길 신경일 서응시 윤여익 김성원 박호 조경남 전충남 고명원 강몽조 등이다. 아들 완기는 전세가 불리하자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고자하여 화려한 관복으로 위장하고 싸우다 죽었다. 적이 퇴각한뒤 선생의 제자인 박정량 전승업이 7백의사의 유골을 모아 한무덤을 만들었다. 뒤에 제자인 민국이 지방인사와 상의하고 관찰사와 군수까지 협조하여 비석을 세우게 되고 송방조의 청으로 윤근수가 비문을 지었다. 끝에 붙이 가사의 몇구절을 다음과 같이 옮긴다. '장렬하도다 온 진영의 순국이여! 부서졌을 망정 완전한 것이며 죽어도 영광스러웠다. 침략자를 소탕하고 남방의 치역을 방어하였으므로 국가는 비로서 평화가 깃들었다. 구름은 뭉게 뭉게 새들도 구슬피 우는데 장렬한 넋은 한 구덩이에 잠들었도다 천추에 이르도록 이 비문이 읽히터이니 여기에 묻히신 영혼이여! 영원히 살아계시는듯 하여라'
원비는 1903년 계묘 4월 해평부원군 윤근수짓고 김션성이 썻음. 1971년 4월 1일 임찬은 번역요약하고 서희환 씀 문화공보부가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