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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칼럼 • 6·3사태 60주년에 그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한다 11 반일정책에서 벗어나 일본과 수교하고 경제에서 뿐만 아니 라 여러 부문에서 협력해야 한 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무 엇보다 정권 스스로 표방하는 경제건설을 위해서는 일본으 로부터의 경제지원이 절실하 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박 의장이 일제의 괴뢰국이었 던 ‘만주국’에서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일본에서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해 만주국 장 교로 봉직한 경력, 그리고 그의 군사정변을 뒷 받침한 인사들 역시 박 의장과 같은 만군파(滿 軍派) 출신이라는 사실 등은 그들로 하여금 친 일적 정책을 채택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박정희 정권은 출범과 동 시에 한일수교를 향한 길에 들어섰다. 당시 박 정희 정권의 제2인자로 초헌법적 기관인 중앙 정보부를 창설하고 부장이 된 김종필은 1961 년 10월에 도쿄를 방문하고 수상 이케다 하야 토(池田勇人)와 회담하면서 곧 있을 박정희 국 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방일을 논의함과 아울 러 한일관계의 개선을 위한 기초작업에 들어갔 다. 실제로 박 의장은 미국 대통령 케네디를 방 문하는 길에 11월 11~12일 이틀에 걸쳐 도쿄 에 머물며 이케다 수상과 회담했다. 이 자리에 서 박 의장은 자신의 정부가 지난 날 일제의 조 선 식민지배에 얽매이지 않고 한일관계를 개선 할 뜻이 있음을 자진해서 밝혔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으로부터 한일관계 를 ‘정상화’하도록 권고 또는 압력을 받고 있던 이케다 정부는 박 정권의 태도에 심리적으로 여유를 갖게 되었다. 1962년 11월 12일에 도 쿄에서 김종필 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 芳) 외상 사이의 합의는 이러한 배경에서 성립 되었다. 메모 형식의 이 합의에서 일본은 한일 수교를 기점 삼아 앞으로 10년 동안 한국에 ‘무 상 3억 달러, 유상차관(대외협력기금) 2억 달 러, 수출입은행 차관 1억 달러 플러스 알파’를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 돌이켜보면, 박정희 정부가 추진하고 성사시 킨 한일수교는 큰 틀만 놓고 따진다면 언젠가 는 해야할 일을 한 것이었다. 일본으로부터 차 관만 해도 원래 한국이 요청한 14억 달러에 미 치지 못했으나, 1965년 6월 한일협정 체결 때 는 8억 달러로 늘어났으며, 이렇게 들어온 외 화는 박정희 정부에서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 1965년 2월 20일 한국 측의 이동원 외무부 장관과 일본 측의 시이나 외상이 참석한 가운 데 양국 관련 대표가 한일기본조약을 가조인하고 있다(조선일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