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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5월31일 금요일 11 (제209호) 기획 강선계는판밀직사(判密直事)옥산전공(玉山全 公) 휘(諱) 의룡(義龍)의 사위 동래부사 아산장공 (牙山長公)휘흥부(興膚)와밀양박문의대사헌(大 司憲) 휘(朴公諱) 해(咳) 등 삼옹서간 후예들이 옛 정의(情誼)를강구(講究)하여새롭게돈목(敦睦)하 기 위해 1923년 만든 모임으로 당시 김현주 선생의 서문을인용해보면다음과같다. [강선계는 전(全)장(蔣)박(朴) 3성씨(姓氏)가 옛 정의(情誼)를 강구(講究)하여 새롭게 돈목(敦睦)할 모임의이름이다. 판밀직사(判密直事) 전공(全公 휘(諱) 의룡(義龍) 의 청렴(淸廉)한 명예(名譽)와 곧은 절개(節介)는 백 세에 드리워져 있고 동래부사(東萊府事) 장공 휘(蔣 公諱)흥부(興膚)와대사헌(大司憲)박공휘(朴公諱) 해(咳)는 그의 사위이시다. 청풍(淸風)은 쉼 없고 후 세(後世)에 남긴 음덕(蔭德)은 끊이지 않았으니 이 어찌위대(偉大)하지아니하랴오직저경산천매(慶山 川梅)는 곧 세 어른이 평소(平素)거니시던 곳이다.오 백여년(五百餘年)의간격(間隔)이막연(漠然)하여다 만 산 높고 물 맑은 경치(景致)를 보니 그럴 듯한 초목 (草木)은 향기(香氣)를 머금었고 고요한 산수의 경치 는 옛 모양 변치 않아 거의 비슷하니 앙모(仰慕)하고 의지(依支)할 곳이다. 또 세 어른의 무덤이 모두 같은 고을에 있으니 묘소(墓所)의 무성(茂盛)한 송추(松 楸)는 이슬 맞고 서리 맞아 쓸쓸하니 무릇 관계(關係) 자손 된 자 어찌 구의(舊誼)의 감회(感懷) 두렵고 근 심되지 아니 하리오 세대는 점점 멀어지고 후손(後 孫)마져 점차소원(疏遠)해지면 서로가 잊게 되어 강 구(講究)가 불가할지니 이 어찌 두렵지 않으리까 장 (蔣) 박(朴) 첨현(僉賢)들은 각기(各其) 곧 금년 묘사 (墓祀)지낸 자리에서 준엄(峻嚴)한 발의(發議)로 수 계(修契)를 논의(論議)하여 명명(命名)하기를 강선 (講先)이라하고일언(一言)으로서문(序文)을강(講) 함에 내 곧 작술(作述)하다 아름답도다 이제 이 말을 들어 논제(論題)로 삼노라 공융(孔融)과 이부(李膚) 의교의(交誼)를후세(後世)사람들은반듯이강구(講 究)해야하고소동파(蘇東坡)와황산곡(黃山谷)의우 의(友誼)또한사기(史記)에실여있으니이어찌아득히 오래되었다 하여 잊을수있으랴 하물며 옛터에 있었던 한그루의은행나무는해마다봄의아름다운빛을이전 의상태와같이돌이키듯즉지금은비록쓰러졌다지만 이계(契)의설립은우연이아닐지니이제묘소의전나 무는 다시 소생(蘇生)하리라 가히 점칠 수 있도다.) 100주년 기념행사에는 이창언(영남대학교 문화 인류학과) 선생이 ‘친족관 행의 변화에 관한 일고(강 선계를 중심으로)’의 학술 발표가 이어져 강선계와 조선 전후기의 친족관행 에 자세하게 발표하여 참 석한 많은 사람들을 감동 시켰다.이에 이창헌 선생이발표한 ‘강선계의 현재` 의의’를소개해본다. 강선계는혼인으로연결된인척관계의세가문에 서 오랜 세월 동안 이어 온 우의를 기리는 친족계에 서 출발하였다. 강선계를 구성하는 세 가문은 대구 와경산일대에세거한옥산전씨,아산장씨,밀양박 씨이며,이들세가문의인연은600년전인고려말엽 부터 시작되었다. 경산에 기반을 두었던 옥산 전씨 가문의 고려 말 판밀직사를 지낸 전의룡(全義龍)은 슬하에2남 3녀를두었다.이중 세딸의혼사를통해 아산장씨,밀양박씨,여산송씨(礪山宋氏)를사위로 맞아들였다. 첫 딸은 동래부사를 지낸 장흥부(蔣興 膚)와둘째딸은대사헌을지낸박해(朴咳)와관찰사 를지낸송인(宋因)과혼인하였다. 동서지간을이룬 이들세사위는장인의인근에거주하면서교의를다 졌다. 장인의사후에도사위들은당시의관행대로처 가의제의에참여하는등친척으로서관계를지속하 였다.세동서지간의교의를기리는관행은대대로이 어지다가 여산 송씨의 대가 끊긴 이후 장인 가문인 옥산전씨가합류하여현재에이르고있다.일제강점 기인1923년에강선계를결성해세가문이매년번갈 아계를주최하며인연을이어가고있다. 고려 말엽부터 맺은 인연은 조선 시대로 이어져 세 가문은 교의를 쌓으며, 여러 인재를 배출하였다. 여러 인물 가운데 옥산 전씨는 조선 건국공신인 문 평공 전백영(全伯英)과 대구지역 최초의 서원인 연 경서원의 건립에 기여하고 성리학의 학풍을 진작시 킨계동전경창(全慶昌)이있다.아산장씨는청송부 사를 지낸 장문도와 임진왜란 때 밀양 일대에서 왜 적을물리친의병장장문익(蔣文益)이있다. 밀양 박씨는 단성현감과 연기현감을 지낸 박울 (朴蔚)과 박순조(朴順祖), 돈녕부도정을 지낸 박사 신(朴士愼),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박성 (朴惺)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대한광복군 총사령을 지낸박상진(朴尙鎭)이있다. 세 가문의 교의를 이어가는 강선계 결성의 의의와 지향을이해할수있는계안의서문과1992년에개정된 규약을살펴보면혼인으로맺어진세가문의관계를높 이 기리고 오랫동안 지속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 다.일찍이장인과사위로연을맺은세분을추모하고 오랜 인연을 더욱 도탑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 다. 2022년 100년째를 맞이하는 강선계는 시지동과 파 동을 비롯한 수성구 일대에 세거하던 세 문중이 울산, 영천,밀양,청도등각지로이주하면서도그인연을지 속하고 있다. 이들은 여전히 경산시 남천면 대명리의 상호군전의룡의묘소벌초와묘사는몰론다른가문의 묘사에도 참여하고 있으며, 이와는 별도로 매년 계회 를개최하고있다.이런모습은조선초기의친족관행 에서 보편적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변화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비부계친의 관계가지속된것인지혹은부계친중심의친족관행이 지속한것인지아니면강선계에서만발견되는독특한 현상인지는좀더많은자료와논의를필요로한다. 강선계의운영은각종족집단에서번갈아맡는계장1 명과부계장2명외에,각종족집단에서각1명의감사와 임원을포함한임원회를중심으로이루어지고있다.매 년음력4월10일에개최하는강선계모임에서총회를개 최하여강선계의활동을논의하고,각가문의대소사에 관한정보를공유하고있으며,때로시회(詩會)를통해 한시경연을개최하고있다.강선계결성당시에는묘사 일인 음력 10월 10일에 계회를 가졌으나, 1980년대부터 묘사와분리하여음력4월에회의를개최하고있다. 성원의 고령화와 후손의 거주지가 전국적으로 확 산되면서 매년 강선계에 참여하는 인원이 줄어들자 2010년부터는 입회비와 계비를 면제하여 성원의 부 담을줄였다.이와더불어회장을맞는가문에서계회 에소요되는경비일체를충당하고있다.계회의비용 은세가문이보유하고있는수성구시지지역에소재 한임야가개발됨에따른보상금으로충당하고있다. 현재 강선계는 한 문중에서 2년간 회장을 역임하 고 있으며, 2021년 현재 옥산 전씨 가문에서 회장을 맡고 있다. 2019년부터 옥산 전씨 가문에서 회장을 맡아왔지만,코로나19로인해2020년과2021년의행 사를개최하지못하여2022년에도옥산전씨가문에 서 회장을 맡기로 하였다. 현재에는 아산 장씨 가문 에서회장을맡고있으며,강선계결성100주년을맞 아강선계지증보판을준비와후손장학사업과선현 유적탐방,초청강연회등의사업을계획하고있다.2 017년의 강선계는 수성구 시지동에 소재한 밀양 박 씨 재실인 솔일재(率一齋)에서 열렸으며, 2018년에 는영천시임고면에소재한밀양박씨청풍당선생을 제향하는우고서사에서열렸다.2019년 모임은 옥산 전씨 대종회 재실인 경산시 남천면의 학명재(鶴鳴 齋)에서 열렸으며, 2023년 모임은 밀양 아산장씨 래 독재에서개최하는등활동을지속하고있다. 이상에서처럼 강선계는 부계 중심의 친족 관행의 관점에서보면익숙하지않은사회조직이다. 그러나 적어도 조선 전기의 친족 관행에서 볼 때, 강선계는 장인가문과사위가문사이의친밀한관계를반영하 는 매우 일반적인 광의의 친족계로 간주해 볼 수 있 다.당시에는재산과제사의상속에관련한당연시되 는관행으로서부계혈족사이의관계에못지않게중 요한의미를지녔다.오히려부계친사이에서보다더 큰 정치·경제·사회적 의미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조 선 전기의 양변 적 친족 관행, 특히 자녀균분상속의 관행을 지배층의 정치적 필요성으로 설명하기도 한 다.자녀모두에게고르게상속함으로써절대적인부 와권력의집중을방지하는여건을조성했다는것에 서시대적이고정치적인필요성을이해할수있다. 이처럼 조선 초기의 자녀균분상속제는 가족제도,친 족제도,혼인과밀접히관련되어있으며,시대와상황에 따라변화하였다.양변적친족관행에서부계친으로,자 녀 균분상속에서 자녀 차등상속으로 그리고 남귀여가 혼에서여귀남가의친영제(親迎制)로변화한배경을여 기에서세밀히살피기는어렵다. 다만여러가지요인이 작용한결과인시대적상황의변화에따라친족관행이 변화한것에주목해볼때,강선계는한국의친족관행에 관한학술논의에있어서다음과같은의의를지닌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의 친족 관행의 변화와 관 련해서는조선전기와후기로구분하여양변적친족관 행에서부계중심이친족관행으로변화했다는주장이 정설로 여겨져 왔다. 이에 비판적인 관점에서 한국 사 회는역사적으로줄곧부계중심의친족관행이지배적 이었다는것과이와는반대로줄곧비부계친친족관계 가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강선계는비부계친친족관계의중요성과관련 하여일정한의의를지닌다. 즉,혈연과혼인에기초한 집단을친족으로규정할때,개개인의부변,모변,처변 에속한집단은개인과집단의생활에최우선적인관계 를 이루는 집단이다.더욱이 혈연과 지연의 원리가 큰 의미를지녔던전통사회에서친족관계는사회생활에 매우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점에서 조선 후기에 비부계친친족관계의중요성에관한주장은강선계 지속의배경을이해할수있는부분이다. 조선 전기의 친족 관행이 후기에 변화한 배경과 관련 하여강선계의또다른의의를언급할수있다.조선전기 의양변적친족관행이후기에변화한배경에는여러가 지요인이작용하였다.우선성리학적윤리와예학의발 달및이에따른조상숭배의식과 동족의식의고양이라 는유교적가치관의보급과영향의확대하는요인외에 시대적상황에따른많은요인이작용하였다.즉,임란이 후변화한정치·경제·사회적배경이큰요인으로작용했 다.임란이후천민의수적감소는중앙에거주하는훈구 세력,특히부재지주층의기반약화를초래하는대신중 소규모의 지주였던재지사족의 저변이확대되는 계기 가되었다.이러한지배층의변화와더불어하층민의성 장과저항등의경제및사회적변동이크게작용하였다. 이외에도 인조반정 이후 조정에서 강상(綱常)과 명분 (名分)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강조하는 정치 적이유등여러요인이복합적으로작용한결과이다. 이처럼 시대적 상황의 변화가 가치관의 변화에 커 다란영향을미쳤다는것을고려할때,친족관념이나, 친족관행도예외없이시대나상황의변화에영향을 받은결과물임을이해할수있다.앞서언급한근대이 후 가족 및 친족 관념과 관행의 지속 혹은 해체에 관한 논의도 이런 맥락에서논의되었다.근대와현대의산 업사회를 거치면서 친족 관행이 급격히 해체되는 사 례도 있는 반면에 오히려 강화되거나 새로운 형태로 지속하는사례에서조선후기이후지속한부계중심 의친족관행의현대적형태를예측하기도하였다. 그런데 가족 및 친족의 관념과 관행은 소위 후기 근대적 상황에서 또 다른 변화를 겪고 있다. 가족의 유형과 규모의 급격한 변화에 따른 전통적인 가족 관념의 해체적 양상과 크게 간소화되거나 위축되는 친족 관행은 한국 사회에서 가족과 친족의 미래 양상 을 예측하기 어렵 게 하고 있다. 세 계적으로 유례없 는 한국 사회의 저 출산과 고령화에 영향을 미친 대내 외적 정치·경제· 사회·문화적 요인 이복잡하게작용하고있기때문이다.하나가된지구 적 삶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 상황은 향후의 예측을 더욱 어렵게 한다.복잡한 지구의 상황은 향후 더 큰 폭의지속적인변화가예상되기때문이다.분명한것 은 한국 사회의 가족과 친족의 관념과 관행은 조선 시대중엽과근현대기를 거치면서변화했듯이,향후 계속변화할것이고변화의폭도이전보다클것이다. 최근 한국의 가족과 친족 관념과 관행에 큰 영향을 미 친것은IMF경제위기이다.이후가족의규모가축소되 고 1인 가구가 보편화되고,친족의 관행도 크게 간소화 되고있다. 전통적인남아선호사상도예스러운인식이 되고있다.부계중심의관행이제례와상장례에일부 남아 있으나이마저도 크게 간소화되고있다.일상에 서친족관행은이전과같이부계중심에서양변적인 형태로변화하는 양상이 뚜렷하다.이미상속은 조선 전기와 마찬가지로 자녀균분상속이 법제화되었다. 심지어 젊은 세대의 비혼(非婚)추세와 이로 인한 저 출산의문제해소를위한논의로부상하는친족간혼 인 금지 범위도 언급되고 있다. 비록 한국인의 3/4이 근친혼의 금지 범위를 현행과 같이 8촌 이내로 하는 것에찬성하고있으나,향후의변화를예측하기쉽지 않다. 이는 동성혼(同姓婚)을 허용했던 조선 전기의 혼속(昏俗)을연상하게한다. 이상에서처럼최근한국사회의가족과친족관행은 오히려조선전기의그것에유사하게바뀌고있다.이런 양상이 급변하는 지구적 상황에서 가계계승을 중시하 는한국인과한국사회의어려운결정의결과인지아니 면세계사적추세의반영으로향후새로운방향으로전 개될것인지에관해서는면밀한관찰과분석이필요하 다. 이런면에서조선전기의친족관행에서유래된인 연을현재에도이어오며더욱활성화하는노력을기울 이는강선계는사료적가치가높다. 나아가강선계의전 승은 서구식 생활양식의 보편화로 인간관계가 파편화 되고소외가만연한현대사회에서시사하는바가크다. 강선계 100주년은 21세기를 살아오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삼 성씨 후손들의 열정과 타고 난숭조심에감복하지아니한사람어디있을까? 이에 지난 달 20일 개최된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 석한 후손들은 어느 때보다 돈독한 정을 나누며 전 통문화유산으로후손에게물려줄것을다짐한다. 이날 장환성 회장 강선계가 정식으로 조직되고 그 후 몇 번의 병화풍란을 임해도 삼공의 후예 선인들께 서는 옹서지간의 유지덕행을 저버리지 않고 온갖 고 행을참고묵묵히예손된임무에도리를다해오늘의 거룩한 행사가 있게끔 꽃동산을 이룩하여 현 우리 후 손에게전수되었다고말하고선인들의굳건한정신을 이어받들어뒤에오는후손에아름답고더없는주옥 (珠玉)대기(大器)를오점없이전해애한다고하였다. 장 회장의 말처럼 이는 ‘강선계백년사’ 한권의 책 으로 만들어졌다. 대사헌공 후예 경해 편집위원장, 박재양 간사를 비롯 삼 가문의 편집위원들이 약 2년 에걸쳐심혈을기울여세상에내놓은것이다. 출판을맡은박종우사장은정말조심스럽고어려 웠다고 말한다. 이는 삼 가문 선현의 놀라운 업적과 후손들의열정에반했기때문이다.이에장환성회장 은박사장에게공로패를전달하며노고를치하했다. 그리고 본보에서는 600여 년 동안 옹서·동서간의 후예들이 돈독한 정을 이어온 사실에 이를 더욱더 알려우리사회에또다른이정표가되길기대하면서 특집으로게재하게되었다. 1923년결성된옥산전씨븡아산장씨 븡밀양박씨세가문의돈독한교의(交 誼)븮눈길븯 특집븣강선계100주년 지난달20일대구광역시동구소재노인복지회 관에서는수백명이움집한가운데뜻깊은행 사가열렸다.옹서·동서로인연을맺은세가문 의 후예들이 600여년 이어지는 돈독한 사랑의 결실을거두는자리였다.이를빌어‘강선계100 주년’ 기념 행사이다. 보통의 계(契)를 논하면 향약정신의 구현을 통한 이상향을 건설하려는 의도로만들어진‘대동계(大同契)’가있고학맥 을중심으로같은문인들의후예들이모인계모 임과학문과사상의동질성을같은띠동갑들의 모임이 그것이다. 향약정신 구현을 위한 대표 적모임은전남영암구림계를들수있다.이는 1500년 후반 경에 결성되어 지금에 이르고, 태 종이방원(정안군)을중심으로한21명의갑계 는공신을주축으로결성되었으나이는정치적 성격이 강해 일시적 모임으로 끝이 났다. 그리 고 경북 안동지역의 임계계(壬癸契)는 영해박 씨봉화봉성문중의입향조석림(石林)공휘흡 (洽) 등이 1613년(광해5)안동 학가산 광흥사에 서옥봉권위(玉峯權暐)선생을비롯한임자(壬 子)·계축(癸丑)생(生)을중심으로한11명이맺 은 임계회(壬癸會)를 조직하여 경서를 강론하 고학문을갈고닦으며동경(同庚·同甲)의우의 를 다져 오륜의 하나인 붕우유신(朋友有信)의 도리를 다하고자 설립되어 지금에 이른다.이처 럼대동계나같은학맥을중심으로또는띠동갑 끼리의 계는 전국적으로 많이 전해지고 있으나 혈연을중심으로하는모임은찾아볼수없다.21 세기문명을달리고있는현세의가정을보면형 제간에도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 음에도 600여 년 동안 옹서·동서간의 후예들이 돈독한정을나누고살아가는모임은아마도강 선계(講先契)뿐인가싶다.이에강선계의태동 과현재그리고세문중을함께소개해본다. 강선계100주년을맞아세가문의후손들이또다른100년을위해손을잡고다짐하고있다. 100주년을기념하는시루떡절단을하고있다.왼쪽부터박중근교수,장 환성 회장,박일섭전회장 박종우서재문화사대표(右)강선계백년사책을장 환성회장에게전달하고있다. 강선계100주년을맞아그동안헌신해온유공자에게박중근전경북대교수(밀양박씨후예,사진가운데)가공로패를전달하고있다. 강선계의태동 강선계의현재적의의 강선계100주년기념행사 뱚발뱞뱞행뱞뱞인:박순구 뱚취재편집:박상섭 뱚경영지원:박재기 기사제보븡광고신청븡구독안내 대표전화(053)588-7300 FAX(053)581-0067 뱚구독료년40,000 입금계좌:농협453013-55-000691 예금주:한빛신문 뱚뱜 42612 대구달서구달구벌대로1221(이곡동538-2)성창B/D5층 뱚뱜 본지는신문윤리강령및그실천요강을준수합니다 (2007년1월12일등록번호대구다-01225) 500만박씨성손의대변지 2007년1월24일창간(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