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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2.9의거 사기(事記) 여기에 세워진 천안2.9의거 기념탑은 1946년 당시 천안군(현 천안시) 우리 고장에서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두 이념의 대립속에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와 조국수화를 위해 천안지역 민간 소방조직으로 구성된 천안의용소방대원들이 중심이 되고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로 목숨을 던져가며 질서를 회복시키고 치안을 유지시킨 시민운동을 기리기 위한 탑이다. 천안의용소방대는 1945년 해방 후 어수선한 나라의 정세속에 8월 30일 초대대장 김강수를 필두로 100여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천안의용소방대를 창설하게 되었다. 이런 혼탁한 정세가 이어져 1946년 1월 신탁통치(국제연합이 한국을 통치)의 갈림길 속에서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좌익계와 반대하는 우익측의 대립이 지속되었고 동년 1월 11일 약세에 놓인 우익인사들은 구국의 일념으로 거의 천안의용소방대원으로 구성된 광복청년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당시 천안에 잠적한 좌익세력(공산당원)들은 세력을 확장하며 우익인사를 살해할 목적으로 무기를 만들고 자신들의 목적에 반대하는 우익인사 김광수 초대의용소방대장을 비롯 천원군수, 초대경찰서장 등 지방유지 30여명을 살해할 음모를 획책하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1946년 2월 9일 흑성산에 산불이 발생하여 출동했던 천안의용소방대원들은 산불진화 후 대원 전체가 큰재빼기에 모여 천안지역에 활동중인 좌익세력에 대한 소탕작전에 합심 단결하여 앞장서기로 뜻을 모았다. 이에 천안의용소방대원과 광복청년단은 그들의 거점을 급습하여 공산주의자들을 체포하고 우익인사 살해 등 만행에 쓰일 수백정의 무기를 노획하였으며 좌익 20여명을 체포하고 정신개조 및 교양교육을 시킨 후 귀가시켰다. 하지만 사건이 있은 후 좌익세력들은 힘있는 좌익계열의 인사를 앞세워 당시 2.9의거에 참여한 천안의용소방대원과 애국청년들을 개인주택 및 공장 파괴자로 몰아 미군정 포고 제1호(난동및 파괴행위 금지) 위반으로 충남경찰국으로부터 15명의 인사를 체포케 하여 대전형무소에 수감하게 되었다. 결국 이 사건의 판결은 서울고등법원까지 이어져 전원 무죄 판결을 받으며 우익측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더불어 천안2.9의거 사건은 성환을 비롯 전국으로 확대되어 좌익(공산주의자)을 소탕하는 단초가 되었다. 그 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며 7월 8일 천안은 북한군의 손에 들어갔고 당시 도주하여 월북하였던 공산주의자들은 수 많은 애국인사와 2.9의거에 참여한 천안의용소방대원들을 잡아들여 잔인한 고문 등을 자행하며 7인의 천안의용소방대원들을 학살하였다. 이러한 구국의 일념으로 참혹한 시기에 국내 최초로 공산주의자 소탕작전에 천안의용소방대원들이 목숨을 던져가며 참여하고 전개한 사건을 천안2.9의거라 칭한다. 2021년 11월 천안2.9의거 기념탐을 이곳에 새로이 이전 건립하며 6.25 전쟁당시 학살 당하셨던 7인의 의사자 이름을 천안의 역사에 영원히 기억하고자 여기에 새깁니다. 윤길순 최역산 이갑복 이기경 정영보 송하영 홍병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