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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수리 학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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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근세기 미증유의 민족사적 비극이었다. 당시 피란 갈 틈도 업시 고립된 강화주민들은 인민군의 통제하에 지내야했다. 9.28수복과 함께 청.장년들은 후퇴하는 인민군의 통제하에 북쪽으로 가고 남은 가족들은 경찰과 반공청년단체들에 의한 부역혐의자 색출 공포 속에 떨어야 했다. 많은 주민들이 구금된 상태에서 1.4후퇴가 시작되었다. 이때 경찰과 강화향토방위특공대는 강화본도에 구금되어 있던 주민들이 인민군에 협력할 것이라 예단하고 아무런 법적 절차도 없이 갑곶나루돌머루포구, 옥계갯벌, 대문리고개, 사슬재등지에서 139명을 학살하였다. 한편 교동도에서도 같은 이유로 북한에서 피란나와 조직된 유엔군유격대 소속 강화해병특공대와 해병특공대가 안개산, 고구리, 인산리, 난정리, 양갑리, 무학리, 지석리 해안등에서 183명을 학살하였다. 학살은 부녀자, 노인, 어린아이를 가리지 않고 자행되었다. 강화는 야만의 현장이었다. 이런 비극이 있는 지 반세기가 지나도록 어느 누구도 이 사건을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와 할머니 남동생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도했던 서영선 강화유족회장은 시간이 지나도록 잊혀지지 않은 억울한 진실을 밝히고자 처절하게 분투하였다. 헌국전쟁 민간인학살진상규명법국민 위원회와 전국유족협의회 활동을 통해 국회에서는 과거사특별법이 통과되었고 이 법에 의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국가기구로 출범하였다. 동위원회는 강화지역에서 322명의 민간인 희생사실을 확인하고 강화향토방위특공대와 해병특공대등의 폭력행사를 통제, 감독하지못한 책임이 국가에 있음을 결정하였다. 이에 경찰청장과 국방부장관이 유족들앞에 공식사과문을 발표했고, 추모비건립이 추진되었다. 추모비건립위원회와 강화군의 지원으로 이 추모비건립이 가능했다. 이곳은 322명의 시신도 거두지 못한 억울한 영혼이 잠들어 있다. 살아남은 가족들은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 공식확인이 있기까지 60여년동안 통한의 세월을 보내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