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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➋ • 해외 순국의 현장을 가다 ③ 109 기세에 있었던 일제 당국의 비위 를 거르스면서까지 대한제국을 옹호하는 국가는 없었다. 그나마 특사들의 활동과 이준 열사의 순국으로 세계인의 관심 을 끌었다면 그것이 소득이랄 수 있었다.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 없 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바쳐가면 서 까지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불 귀의 객이 되신 이준 열사께는 아 무리 감사의 뜻을 표해도 모자랄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사망 의 원인이 무엇이었느냐를 이른 바 고증이랍시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이를 두고 일제나 국제사 회가 어떤 반응을 보였으며, 그에 대한 대한제국의 대책이 옳았느 니 어쩌니를 따지는 학자연(學者 然)하는 부류도 있다. 사실을 왜곡 해서는 안 되겠지만, 숭고한 희생 앞에서 우리가 취할 태도는 숙연 함뿐이다. 헤이그 특사의 사실이 세계적 으로 알려지면서 당혹했던 통감 부 등 일제 당국은 특사들을 재판 에 회부했다. 물론 특사들은 재판 정에 출석하지 않은 채로 진행된 궐석 재판이었다. 재판은 1907년 7월 20일에 평리원(平理院)이 개 정하여 정사인 이상설은 사형, 부 사 이준과 이위종은 종신형이었 다. 이준 열사는 이미 사망하였음 에도 종신형을 선고한 것이다. 광 무황제는 이 재판에 앞서 7월 19 일에 황제의 자리를 양위하였다. 물론 일제 통감부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고, 당시 통감은 이토 히로 부미[伊藤博文]였다. 일제는 이를 빌미로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로 해산시키고 말았다. ➏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헤이그 빈덴호프왕궁 기사홀(가운데) ➐ 만국평화회의 장면(이상 독립기념관 제공) ➏ 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