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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➋ • 한국통감과 조선총독의 일본 현장을 가다 ⑩ 109 기 위하여 군수공업 육성에 노력 하였다. 1937년, 히로다 고키[ 広 田弘毅] 내각이 총사직하자 조각 의 명을 받았지만 육군 중앙의 중 견 간부들의 반대에 부딪혀 단념 하였다. 1938년의 고노에 후미마 로[近衛文麿 ] 내각에서 외무상 겸 척무상(拓務相)이 되었다. 2차대 전 이후에도 일본 정계에서 활동 하였던 인물이다. 비록 내각총리 대신을 역임하지는 못했으나, 여 러 내각에서 요직을 수행한 일제 정계의 최고 실력자 가운데 하나 였다.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 우가키는 제6대 총독으로 부임 하기 이전인 1927년 4월에서 12 월까지 임시 총독을 지냈던 적이 있다. 이때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 코토[齋藤實]가 제네바 군축협상 을 위해 유럽에 파견되자 그 직을 맡아 임시로 수행하였다. 그리고 1931년에 정식으로 조선총독에 임명되었다. 우가키는 그 이름이 잘 알려진 조선총독은 아니지만, 식민지 조 선의 변화에는 커다란 영향을 끼 친 인물이다. 그는 60대 중반이라 는 나이에 부임하였으므로 정무 총감을 젊고 경제에 밝은 이마이 다 기요노리[今井田淸德]를 데려 왔다. 이마이다는 우가키와 같은 시기에 퇴임하였다. 우가키는 한 반도를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화 하기 위하여 공업, 산업을 활발히 일으켰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 화 론’의 실질적인 배경이 되는 시기 라고 할 수 있다. 이때 함경남도에 장진강 발전소 등이 건립되었으 며, 조선의 중화학공업단지화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우가키 총독 시기에 조선에는 ‘골드러시’라는 말이 유행했다. 우가키때 부터 우 리나라에 금 캐는 것을 장려하였 기 때문이다. 무리한 ‘남면북양(南 綿北羊)’ 정책이 재추진되기도 하 였다. 한편으로 우가키는 ‘정신교화’ 라는 이름으로 조선인들의 황국 신민화(皇國臣民化)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역대 조선총독 가운 데 5년간의 재임 기간 중 일제의 전쟁 준비와 소위 ‘내선일체(內鮮 ➊  육군 장성 시절의 우가키(나무위키 제공) ➋  우가키의 고향 오카야마에 있는 오카야마성(오카야마현 제공).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도요토 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고 쌓은 것이다.  ➌  1933년 8월 우가키 조선총독의 현지 시찰 장면(민족문제연구소 제공) ➋ ➌ 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