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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112회) • 충남 서산의 독립만세 시위운동(1) 109 학생 중에서 체격이 좋고 의협심이 강했으며, 줄곧 학급 급장(반장)을 했다. 학년으로는 이계성이 1년 선배지만, 나이는 김관룡이 한 살 많았다. 이계성이 김완룡에게 말했다. “다른 학교에서는 조선의 독립 만세를 부르고 있 다. 우리도 독립만세를 불러야 할 것 아니야? 오늘밤  고별식이 있다며? 오늘밤에 독립만세를 부르자.” 또한, “학교 학생 수가 얼마 되지 않으니, 이전 졸 업생과 예수교인도 함께 참여하도록 하자.” 김관룡도 찬성했다. 이계성은 전날 졸업한 운산면 거성리의 유세근(柳 世根), 같은 면 수당리의 김연택(金然澤), 예수교인 김 병선(金炳善) 등을 찾아가 만세운동 동지를 규합했 다. 이들 4명은 이계성만 학교 1년 선배이고, 나이는 19세에서 20세의 동년배였다. 3월 24일 오후 7시경, 이들 4명은 고별식을 하는 박선양(朴宣陽, 寅陽)의 집인 음식점으로 갔다. 해미 읍성 밖 박선양 집에는 전날 졸업한 제5회 졸업생 이 봉이(李鳳伊), 유한종(劉漢鍾), 최흥량(崔興良)과 재학 생 장기남(張基南, 基東), 양태준(梁泰準), 이기신(李起 信)이 왔다. 김관룡이 말했다 “고별식이 끝난 뒤에 우리, 같이 해미면사무소 앞 과 기타 지역에서 조선 독립의 운동 방법으로 독립  만세를 부르자. 빠지는 자는 때려 패 줄 것이다.” 일동은 모두 찬성했다. 이들은 해미 장날을 기다리 지 않았다. 해미 장날은 음력 5일과 10일로서 3월 26 일(음력 2.25)이 장날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밤 11시경 이계성, 김관룡, 유세근, 김연택을 비롯한 십수 명의 학생들과 예수교인들이 만나 해미 읍성 뒷산에 올라갔다. 이계성과 김관용의 주도로 횃불을 올리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태 극기를 흔들면서 외쳤다. “대한국 독립 만세!” 산에서 내려와 성 밖의 우시장을 돌고 성안으로 들 어갈 때 잠자던 동리 사람들이 달려 나와 합세하여 시위 군중이 2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 시위대는 해미면 사무소 앞에서 소리 높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후 해미 경찰관 주재소로 나아갔다. 경찰이 출동하 여 시위대를 막아섰다. 20여 명이 붙잡혀 가고 해산 했다. 주도자들은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21일 공 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협박죄로 이계성과 김관룡은 징역 1년, 김연택과 유세근은 각각 태 90도 를 선고받았다. 김관룡은 고등법원까지 법정투쟁을 계속했다. (계속)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3 ٠ 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 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을 역임했고, 현재 3 ٠ 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3 ٠ 1운동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 강연을 하고 있다. 필자 이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