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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쿠바의 수도 아바나, 한국독립운동의 ‘화려한 외출’ 109 선전을 선포하였다. 쿠바의 한인들도 임 시정부의 명령에 따 라 일본에 대한 전 쟁을 선포하였으며, 대일선전 포고 제 1주년을 맞이하는 1942년 12월 11일 아바나와 마탄사스 에서 기념식을 거행 하였다. 1942년 8월 6일에는 아바나지방회 집행위원들이 빅토리아총회 장과 함께 아바나주재 미국대사를 방문하여 한인을 보호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재큐한족단의 독립 외교활동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 공습한 직후 쿠바 재류 동 포들의 안녕보장을 연합으로 주선하기 위해 1941년 12월 28일 쿠바의 3개 지방회 대표 11명이 마탄사스 지방회관에 모여 ‘재큐한족연합외교회’를 조직했다. 아바나지방회는 쿠바의 수도에 있는 관계로 쿠바정 부와 외교적 교섭을 담당할 수 밖에 없었다. 아바나 지방회에서는 이종헌‧이인상‧서병학 3인을 선전 위원으로 두고 재류국 관청과 교섭을 담당하게 했다. 북미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쿠바의 수도에 있는 재 큐한족연합외교회를 통해 쿠바 재류 한인들과 소통 하고 있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보낸 한인 증 명패와 증명권은 재큐한족연합외교회를 통해 각 지 역에 배포되었다. 그렇지만 1942년 3월 28일 아바나 지방회 대표 3명이 출석하여 특별회의를 개최해 ‘재 큐한족연합외교회’를 해산하기로 결의하였다. ‘재큐한족연합외교회’가 해산된 이후 쿠바의 한 인 들은 연합국의 적국인 일본인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 하여 자구책을 모색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쿠바정부 에 협조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태평양전쟁 이 발발하면서 한인들에게 가장 문제가 된 것은 국 적(國籍)문제의 해결이었다. 이를 위해 아바나지방회 에서는 쿠바당국과 교섭을 진행했다. 하지만 문제는 아바나지방회가 쿠바관청의 정식 인가를 얻지 못했 기 때문에 정치적 문제에 관해 자유롭게 교섭을 진 행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아바나지방회는 쿠바당 국과 교섭하기 위해 1943년 4월 재큐한족단(在古韓 族團, Colonia Koreana De Cuba)을 조직하게 되었 다. 그해 5월 20일 쿠바 독립 제41주년 기념식에 참 가하여 스페인어로 “재큐한족단은 쿠바 국경일을 축 하”라고 쓰고 태극기와 쿠바국기를 들고 행렬에 참 가하여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재큐한족단은 쿠바의 한인을 대표하는 단체로서 마탄사스‧카르데나스‧아바나 3개의 지방회의 대 이성기의 재큐한족단 회원증(『국외사적지실태조사보고서』 Ⅴ,  2004, 427쪽) 아바나지방회 집행위원장 이종헌이  대한인국민회 상무부 김병연에게 보 낸 공문(1941년 4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