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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 서울, 독립운동과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⑦ 109 는 감옥에서 나온 이후 동아일보 사장을 지냈다. 해방 직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로부터 치 안유지 책임 제안을 받았으나 거 절하였고, 이후 여운형에게 제안 이 들어가면서 여운형 중심의 건 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된 것으로 알 려져 있다. 하지만 정병준 교수는 《1945년 해방 직후사》(2023)에서 엔도가 1957년에 이를 부인한 인 터뷰 발언 등을 근거로 엔도의 송 진우 사전 접촉설을 부인하였다. 해방과 함께 한민당 결성을 주 도하는 등 정국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던 송진우는 1945년 12월 30일 한현우를 비롯한 극우파 행 동대원 6명의 습격을 받고 사망 하였다. 해방정국에서 테러로 숨 진 유력 정치인 중 북한에서는 현 준혁(1906~1945, 평남인민정치 위원회 부위원장)이 처음이었고, 남에서는 송진우가 처음이었다. 양명학의 대가, 위당 정인보 옛 집터 1940년 정인보가 이주한 창 동리 집은 간송(澗松) 전형필 (1906~1962)의 창고에 딸린 초 가였으나, 사랑방도 갖출 만큼 제 법 규모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후 정인보는 전북 익산으로 내려가 있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1908 년 일찍이 상하이(上海)로 망명했 던 정인보는 1912년 동제사(同濟 社) 설립에 함께 하면서 독립운동 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양명학의 대가로 불리기도 하는 정인보는 이 기간 많은 시조도 남겼다.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납북되었고, ‘반동’으로 분류되 어 온갖 고초를 겪다가 1950년 9월 에 유엔군과 한국군의 북진으로 피난하던 중 북한의 관리자들이 기력이 떨어진 정인보를 방치하 는 바람에 낙오되어 그해 11월 사 망했다고 전한다. 벽초 홍명희 옛 집터 소설 《林巨正(임꺽정)》의 저자 ➌ ➍ ➌   고하 송진우 옛 집터 표지판 앞의 답사단 일행  ➍   위당 정인보 옛집터 표지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