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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잃고 백성들은 핢의 희망도 없을때 스스로 몸을 던져 앞장선 이는 5천년 역사에 몇 분이나 되리오. 여기 하우(何尤) 김홍권(金弘權) 선생이 계시니 그 분의 충혼은 이 나라 국민이면 그 누가 흠모하지 않으랴. 구국일념으로 민족의 독립운동사에 큰 자취를 남기고 향토를 빛낸 인물인 하우 선생은 1892년 1월 25일 아버지 용궁김씨 제응(濟應) 어머니 광산김씨 내동(內洞)님 사이에서 삼남중 장남으로 양보면 우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의협심이 강했던 선생은 고려 의종때 태자 소전이신 김존중(金存中)의 후손이요, 임진왜란 선무원종 일등공신 김태백(金太百) 이인좌의 난 평정에 의병장으로 공을 세운 양무원종 일등공신 김중원(金重元) 공이 있어 선생의 품성은 조상의 얼을 그대로 이어받음이었다. 선생은 1909년 비밀독립운동 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안희제, 이원식, 남형우 등과 함께 핵심요원으로 활동하여 독립운동사에 거룩한 발자취를 남긴 분들이었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망하자 청년활동을 통하여 독립운동에 열정을 쏟았으며 1913년 3월 진주산업대학교 전신인 진주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1917년 일본 유학 도중 일본 명치대학생 유경환(柳璟煥)과 교분하면서 조국의 앞날을 걱정한 끝에 국권회복을 위하여 동지들과 중국 상해 임시정부에서 여운형, 조완구 선생과 함께 항일운동 선봉대열에 섰다. 1919년 4월 13일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위원과 재무위원으로 활약 중 구국의연금(救國義捐金) 모집 위원으로 영남 일대 지역을 책임져 활약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만주에서 군자금 모금을 위해 지하공작 활동을 하였다. 선친이 마련했던 많은 재산을 독립운동자금으로 활용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해임시정부 운영에 크게 기여하였다. 대동청년당 동지였던 백산상회 대표 안희제 선생과 지하공작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심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고 부산 산해관을 거점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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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열망하며 밤낮으로 몸을 돌보지 않고 국내외로 넘나들며 투쟁하던 선생은 결국 광복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심신의 과로로 쓰러져 1937년 1월 8일 진주 도립병원에서 향년 46세로 애석하게 서거하였다. 유년시절을 보냈던 양보면 진암 뒷산에 유해를 안장하였는데 정부의 추서에 따라 2000년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으로 옮겼다. 선생의 친구인 국회의원 김범부(金凡夫)는 선생의 혼을 천추에 기리고자 진암마을 앞에 "항상 나라 근심하던 우국지사"였다는 비를 세워(1939년 건립) 선생의 혼령을 위로했다. 정부는 1963년 선생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한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1998년 국가유공자로 기록했다. 선생은 합천이씨 찬식의 딸 도정(道正)과 혼인하여 아들 병성(炳成), 병홍(炳洪), 병인(炳仁)을 두었는데 장남 병성(炳成)은 1929년 아버지의 이념에 따라 일제에 항거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거룩한 국가적 공적만 남기고 빛을 보지 못한채 서거하였으니 애닯고 애닯도다. 우국충심 그 누가 이어가랴. 그러나 민족사는 영원하고 정의는 살이있고 선생의 거룩한 공적은 길이 남아 영남이 낳은 큰 애국지사요 대한민국의 독립투사인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져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 하동군의 지원과 문중의 협조로 국가와 민족위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천추만대에 귀감이 되고자 이 곳에 모든 이의 뜻을 모아 공훈비를 세운다.
서기 2005년 8월 15일 광복 60주년 기념사업회가 글을 짓고 정곡 김만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