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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泉 黃玹先生 年譜(매천 황현선생 연보) 1855년(철종 6) 음력 12월 11일 : 광양시 봉강면 서석마을에서 부친 황시물과 모친 풍천노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남. 1865년(고종 2, 11세) : 구례 광의면 천사 왕석보 선생에게 나아가 수학함. 1878년(고종 15, 24세): 서울로 진출, 이후 강위·이건창·김택영·여유형·정만조·신정희 등과 교유함. 1883년(고종 20, 29세) : 특설 보거과에 응시,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시골출신이라는 이유로 2등으로 강등, 이 사건을 계기로 매천은 벼슬길을 단념하고 광양으로 돌아옴. 1886년(고종 23, 32세): 지인들의 권유로 구례군 간전면 만수봉으로 이주. 1888년(고종 25, 34세) : 성균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한 중앙정계에 실망하고 다시 구례로 돌아옴. 1890년(고종 28, 36세): 구안실을 짓고 독서와 제자 양성에 힘씀. 1902년(광무 6, 48세): 구례군 광의면 월곡마을 현 매천사로 이주 1905년(광무 9, 51세) : 을사조약 체결소식에 〈문변삼수(聞雙三首)〉를 지어 매국노를 성토하고, 〈오애시(五哀詩)〉를 지어 애국 지사를 애도함. 1908년 (융희2, 54세) : 〈사립 호양학교 모연소〉를 지어 신학문과 인재양성을 역설하고, 문인제자들로 하여금 민족정신을 교육하도록 독려함. 1910년 (융희 4, 56세) : 음력 8월 7일 경술국치를 통분하여 〈절명시〉 4수와 〈유서〉를 남기고 자결, 순국함. 1911년 : 동생 황원과 제자 유림등이 성금을 모았으며, 중국에 망명 가 있던 김택영이 「매천집」을 간행, 일제의 눈을 피해 국내로 반입함. 1942년 : 광양시 봉강면 서석마을 문성산 아래 가족묘지에 안장함. 1962년 : 건국훈장 국민장 추서, 1999년 8월의 문화인물 선정, 2000년 매천사당 정비, 2002년 생가 건립, 2004년 동상 건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