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page
108 2025년 3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3월의 전설(112회) 해미 고려 태조 때 설치된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 縣) 두 고을을 1407년, 조선 태종 7년에 합쳐 해미현 이 되었다. 해미의 미(美)자는 여미현(餘美縣)에서 왔 는데, 여미현은 백제시대에는 여촌현(餘村縣), 신라 에 와서 여읍현(餘邑縣)으로 바뀌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150년간 각축하던 삼국시대에 3국의 변경 에 처하여 역사의 소용돌이를 겪어내야 했던 이 지역 의 애환을 말해 준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충청도 사람들의 기질과 성격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세력의 변화에 민감하나 내색하지 않고 은인자중 하는 성격, 일제 침략에 대항하여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던 것에서 보듯, 굽히는 듯 부드러우나 결코 굴복하지 않는 강인함 같은 특성이 충청도 특성이다. 해미읍성은 천주교 박해의 현장이기도 하다. 해미 읍성에서 약 1백년에 걸쳐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순 교했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내를 이루었으며, 수많은 신자들이 생매장 당하기도 했다는 참혹한 이 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러한 혹심한 박해 경험 은 일제에 대해서 도 매우 신중하게 행동 하게 했을 것이다. 혹심한 박해의 고 장 해미에서는 3월 19일과 3월 24일 두 차례 만세시위가 있 었다. 앞의 3월 19일 만세시위는 남상철 (南相喆)이 주도하였 다. 그러나 이 시위와 남상철에 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3월 24일 거의 미동도 하지 않던 해미 지역사회에 서 18살 이계성(李啓聖)이 나섰다. 이계성은 1901년 생으로, 1년 전인 1918년 3월 해미보통학교 제4회 졸업생으로 해미저축조합 서기로 일하고 있었다. 이 계성은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해미의 천주교인 한 병선(韓炳善)과 서울에서 내려온 정(鄭) 신부로부터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받았다. 그는 당직 근무하는 날 밤에 독립선언서를 등사판으로 인쇄하고, 태극기 를 만들며(『해미면지』, 2014, 292쪽) 만세시위를 준 비하였다. 3월 23일 해미공립보통학교 1년 후배들의 졸업식 이 있었다. 이계성은 이튿날인 3월 24일 졸업생과 재학생들이 고별식이라는 이름으로 저녁식사 모임 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계성은 이 고별식에 참석 하는 후배들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하기로 계 획했다. 3월 24일, 그는 읍내에 인접한 해미면 동암리로 김 관룡(金寬龍, 1900년생)을 만나러 갔다. 김관룡은 재 김관룡이 살았던 집 (해미면 동암리 308-8, 김남석 촬영) 서산 해미 만세시위 주도자 이계성의 노년기 모습(국가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