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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지역 6.25참전 학도병 이야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다. 호남신문에 광주지역 학생들의 군부대 자원입대 관련 소식을 접한 우리지역 학생 56명(매산중학교 32, 순천사범학교 9, 순천농림학교 7, 순천중학교 4, 순천공업중학교 3, 순천고등공민학교 1)은 혈서 입대 지원서를 제출하고 7월 13일 행동우체국 앞 광장에서 출정식과 시가행진을 거행했다. 순천을 비롯해 여수, 광양, 벌교, 보성, 강진 등에서 모인 지원 학도병 180여 명은 순천역에 집결하여 당시 풍덕동에 위치한 15연대에서 죽창과 목총으로 9일간 기초 군사훈련을 받았다. 1950년 7월 22일 전주 사수명령을 받고 순천역에서 화물열차 편으로 출동한 학도중대는 23일 남원역에 도착하여 소총과 탄약을 지급받았다. 그러나 학도군 지휘부는 전주가 이미 점령 직전 상황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7월 24일 여수로 후퇴하던 중 최대한 북한군 남하를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율촌역에서 기차를 타고 다시 진격을 했다. 오후 6시 무렵 구례구역을 거쳐 도보로 구례중앙국민학교로 이동하여 잠깐 휴식을 취했으나 밤 10시경 적군의 포성을 듣고 섬진강을 따라 하동 방향으로 후퇴했다. 7월 25일 하동군 화개장터에 도착하여 진열을 가다듬다 새벽 4시경 화개교량 앞에서 전차를 앞세어 중무장한 대대병력 규모의 북한군에 집중 사격을 가했다. 교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이 피난민과 경찰관들은 무사히 화개면을 탈출할 수 있었으나 약 30여 명의 학도병 사상자가 발생했다.7월 26일 진주 촉석루에 중대본부를 차리고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다 창원, 마산 등에서 미 연합군과 합류하여 낙동강 방어 작전을 수행하였다. 학도병 희생자가 늘어나 독자적 전투 수행이 어렵게 되자 60여 명은 육군하사관학교에, 20여 명은 팔공산전투에, 7~8명은 미군부대에 합류하여 게속 참전하였다. 1951년 2월 학도병 해산과 복귀 명령에도 불구하고 현역병으로 전역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이루어짐으로써 포성은 멈추었다. - 출처 : 여수.순천 지방 6.25참전 학도병 동지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