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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➋ • 해외 순국의 현장을 가다 ③ 107 으로는 크게 열악한 상황이라고 추정하였다. 나선형으로 된 계단을 따라 올 라가면 이준열사의 흉상이 방문 객을 맞는다. 그리고 많은 전시물 이 단순한 진열물을 나열한 기념 관이 아니라, 꼼꼼하게 기획하여 연출된 학습의 장소라는 인상을 받았다. 역대 대통령들의 휘호가 보였고, ‘김지하’씨의 이름이 보이 는 방명록도 있었다. 기념관은 헤이그 특사들이 머 물렀던 호텔이었다고 한다. 또한 헤이그 특사들의 호소가 이루어 지지 않자 이준열사가 억울하여 불귀의 객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 다. 현재도 그의 침대 가득히 많은 참배객들이 놓고 간 태극기들이 있다. 이 태극기들은 열사의 명복 을 빌고 대한민국의 번영된 미래 를 기원하는 귀중한 매체가 되는 것 같았다. 광무황제가 이준에게 특명을 부여하다 1907년 열사는 광무황제(고종) 로부터 특명을 받았다. 1905년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 이 무효라는 사실을 1907년 6월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 에 가서 전 세계에 알리라는 것이 었다. 이른바 헤이그 특사를 임명 한 것이다. 헤이그 특사는 모두 3 인, 정사 이상설, 부사 이준, 그리 고 이위종이었다. 광무황제가 이준에게 밀지를 전달한 장소와 시기에 대해서 다 르게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필 자 또래의 사람들은 헤이그 특사 3인이 광무황제로부터 궁궐에서 임명을 받고 동시에 함께 헤이그 로 출발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 들이 적지 않다. 필자도 오랜 기 간 그렇게 알았었고, 을사늑약 이 후에 감시의 대상이었던 광무황 제가 어떻게 그런 행동을 당당하 게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헤이그 특사 3인은 동시에 같 은 시각에 출발하지 않았다. 당시 헤이그 특사 계획은 물 밑에서 이 루어졌다. 이준은 3월에 광무황 제를 덕수궁의 중명전(重明殿)에 서 은밀히 만났으며, 4월에 기독 교 단체를 통해 친서와 특사 임명 장 등을 전달받았다고 한다. 그리 고 이준은 블라디보스톡에 도착 힌 뒤 이상설을 만나 함께 상트 페 테르부르그로 가서 이위종과 합 류하였다. 그 무렵 이상설은 사재 ➊ ➊  헤이그의 덴하그HS역(2026년 2월) ➋ ➌ 이준열사기념관 원경과 근경(이상 필자 촬영) ➋ 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