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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112회) • 충남 서산의 독립만세 시위운동(1) 107 특한 역사를 가졌다.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초 기 선구자들이 내포지역 인물들이었다. 천주 교가 유교적 조선사회와 충돌하여 수많은 순 교자를 냈을 때, 이 지역은 그 박해의 현장이 되었다. 그러나 100년 박해 속에서 천주교가 뿌리를 내리고 크게 발전하게 한 지역이 내포 지역이었다. 1865년 전국의 천주교인 절반이 충청도에 살았고, 그중 절반은 내포지역에 살 았다고 한다. 충남지방에 철도가 들어온 것은 1922년 6월 1일 천안-온양온천 구간이 개통하고, 이듬해 1923년 11 월 1일 예산-홍성 구간. 12월 1일 홍성-광천 구간이 개통하여 경부선보다 20년 이상 늦었다. 거기다 서 산은 철도교통의 소외지역이었다. 이 때문인지 일 제시기 일본인들이 이지역에 많이 들어오지 않았 다. 1919년 당시 서산의 일본인 비율은 조선인 대비 0.3%였다. 이것은 당진(0.2%)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은 비율이다. 충남에서 가장 높은 곳은 대전으로 인구의 9%였고, 논산(3%대), 연기(2%대), 공주(1%대)로 이어 졌다. 한말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될 때 서산은 충남에서 가장 빠르고 활발한 곳이었다. 1908년 7월 기호흥학 회가 전국에 지부를 설치할 때 서산지부가 충남에서 는 가장 빨랐던 것이 그 예다. 대조되는 서산 동과 서의 만세시위 서산의 만세시위는 동쪽의 대호지면(지금은 당진 시)과 서쪽의 서산 해미면 시위로 대표된다. 두 시 위는 대조적이다. 대호지면 만세시위는 면장, 면서 기, 구장과 마을의 성인들이 앞장서서 한 만세시위였 다. 또한 전 주민이 약 25리(10km) 거리의 정미면 으 로 쳐들어가서 천의 주재소를 공격한 격렬하고 공세 적인 원정 시위였다. 반면 해미 만세시위는 10대 후 반 해미보통학교 졸업생과 재학생들이 주도하여 일 어난 청년 학생들의 만세시위로, 시위규모 또한 크지 않았다. 동서 양 지역 지위의 차이는 그 지역사회의 특성을 반영한다. 사실 만세시위와 지역사회의 특성 사이의 관계를 밝혀내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나 자료 와 시간의 한계로 연구가 쉽지 않다. 해미읍내 만세시위 관련 지도(출처 김남석 석사학위 논문) 해미 만세시위 주도자 김관룡의 서대문형무소 수감시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