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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강년 의병장이 체포되자 선생의 집이 있는 영월 주천 금마리 국사봉 자락이 흘러내린 사상포로 낙향하여 서당을 차려 '춘추대의(春秋大義)'와 '존화양이론(尊華攘夷論)'을 후학에게 펼치다 1933년 70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선생의 묘소는 주천면 금마리 사상포에 있었으나 2024년 5월 6일 국립현충원으로 모셨다. 선생이 남긴 '집의당유고'는 필사본으로 시(詩), 서(書),잡저(雜著), 제문(祭文), 통문(通文), 부록(附錄)으로 구성되어있다. 서문은 1951년 아들인 김성모의 청으로 유지혁이 썼다. 서간문에는 자신의 아들 경당 김성모에게 보낸 자상함이 배어나는 편지가 있다. 정부는 일제의 국권침탈에 당당하게 맞서 조국독립을 위해 결사 항전을 전재한 선생의 숭고한 공적을 기리어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항일의병의 발상지인 영월 의병의 역사와 발자취는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아직도 우리 고장 곳곳에 살아 숨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