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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지월스님은 옥중에서도 만세를 부르며 독립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수형성적'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3년으로 형량이 늘어났다고 알려졌다. 옥에서 자행한 지독한 고문으로 지월스님은 오른쪽 볼에 구멍이 생겨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하는 고통을 겪었다. 시위에 동참한 주민, 가족을 잃은 가족들의 원망도 묵묵히 감수해야 했다. 지월스님은 1944년 7월 25일 봉선사에서 세수 54세 나이로 입적했다. 1986년이 돼서야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스님들이 독립운동에 직접 나선 까닭은 유공비에서 가늠이 가능하다. '(중략) 1919년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은 화상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때마침 서울에 유학 중이던 태허당(太虛堂) 성암(星岩) 화상의 귀향으로 사정을 알게 된 화상은 분연히 일어나 만세운동을 일으키시니, 지역 항일운동의 기폭제이기도 했다.' 봉선사 스님들의 움직임은 경기 북부지역 독립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