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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독일 베를린지역 한인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107 포츠담 한인구락부의 의열단원 유덕고려학우회와 더불어 또 다른 재독 한인들의 단체로는 ‘포츠담 한인구락부’가 있다. 이 단체는 베 를린 외곽의 포츠담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반일 단체 이다. 포츠담 한인구락부는 매년 8월 29일 국치일 행사를 거행하였으며, 매주 한번씩 한인들이 모임을 갖고 주제를 선택하여 강연을 듣거나 토론회를 개최 하였다. 일제의 정보자료에 의하면, 포츠담 한인구 락부는 “표면상 이들의 친목기관이라고 칭하고 있지 만, 동(同) 구락부를 능히 포츠담에서 운동을 하고 있 다. 재작년 대진재 때 제국에 대한 재독 한인 활동의 책원지가 포츠담이다. 이 구락부는 일종의 기밀정사 (機密政社)”라고 하였다. 또 다른 일제의 정보자료에 의하면 포츠담에는 “조선인이 경영하는 조선식 요리점이 있어 부근 조 선학생들이 토요일‧일요일 등에 그곳에서 회담을 하여 거의 조선인학생구락부와 같이 보였다”고 한 다. 포츠담 한인구락부에서는 1925년 8월 29일 오 후 4시부터 6시까지 이곳에서 국치기념식을 거행했 는데, 이극로가 ‘감상’을 말했으며 재독 한인 7명이 참석했다, 한편, 포츠담 한인구락부에는 중국에서 활동했던 의열단원들이 이곳에 와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유 명한 의열단원인 오성륜(吳成崙)이 있었다. 오성륜은 1922년 3월 28일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 中義一)를 처단하는 거사를 상하이의 황포탄(黃浦灘) 부두에서 감행한 후 영국경찰에 체포되었다. 그후 일제의 영사관에 넘겨져 그곳에 있는 감옥에 있다가 탈출하여 광둥(廣東)으로 가서 그곳에서 여권을 위조 해서 독일로 왔다. 오성륜의 독일에서의 행적에 대 해서는 거의 기록이 없지만, 김산의 『아리랑』에 매우 단편적인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베를 린에서 그는 어떤 독일인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 1년 동안 그녀의 가족과 함께 살았다. 가지고 있던 돈을 모조리 써버리자 그는 소련영사를 찾아갔고 영사가 수속을 밟아주어서 1925년에 모스크바로 갔다”고 하였다. 오성륜은 황포탄의거 이후 여러 곳으로 도망을 다 니다가 독일로 피신했는데, 그곳에 있던 대표적 한 인단체인 포츠담 한인구락부에 가담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제자료에서 포츠담 한인구락부에 는 ‘의열단원 수명’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당시 독일로 피신한 의열단원은 오성륜 혼자만 아니라 다 른 의열단원도 함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한 한인 유학생 재독 한인들은 대부분 유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유 럽 다른 지역의 학생들과 연계하여 한국의 독립을 선전하고자 하였다. 그 대표적인 활동이 1927년 벨 기에 브뤼셀에서 개최된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서의 반일 선전활동이다. 원래 이 대회는 1926년 8월 베 를린에서 개최하려 했으나 식민지 민족대표의 여행 권 불허 사정과 각 민족대표들의 불참으로 인해 연 기되었다. 그러다가 1927년 2월 5일부터 14일까지 10일간 벨기에 브뤼셀 에그몽 궁전(Egmont Palace) 에서 처음으로 세계피압박민족대회가 개최되었다. 유덕고려학우회에서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세계피 압박민족대회가 개최되자 이극로·황우일·이의경(이 미륵)을 대표로 선정하였다. 그외 프랑스에서 유학 중인 김법린이 프랑스 유학생을 대표해 합류하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