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page

순국 역사기행 • 서울, 독립운동과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⑦ 107 창동리 이정표와 창동 일대의 3·1운동 창동역 인근에는 ‘창동리(倉洞 里)’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조선 시대 양곡 창고가 있었던 창동(倉 洞)의 유래를 간직한 이정표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창동리 일대에서는 3일(3월 26일과 27 일, 29일)에 걸쳐 만세운동이 벌 어졌다. 일제측 자료에는 26일에 는 250명, 27일에는 490명, 29일 에는 500명의 군중이 참여한 만 세시위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 다. 이중 일본 헌병에 의해 해산되 면서 27일에는 7명, 29일에는 주 모자를 비롯하여 92명의 주민이 체포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인근 도봉리에서도 창동리 만세운동이 시작된 3월 26일에 400명이 참여 하는 만세운동이 있었다. 그럼에도 디지털도봉문화대전 은 안타깝게도 26일의 창동리와 도봉리의 만세운동만을 소개하고 있다. 창동역사문화공원에서 만나는 창동 3사자(獅子) 동상 창동역사문화공원은 도봉구 가 2017년에 만든 공원이다. 이 공원에는 일제 강점기 후반 창 동리에 은거했던 창동의 세 사 자(獅子)로 불린 가인(街人) 김 병로(1887~1964), 동아일보 사 장을 지낸 고하(古下) 송진우 (1887~1945), 양명학의 대가 위 당(爲堂) 정인보(1893~1950)를 기리는 창동 3사자 동상이 세워 져 있다. 창동은 당시에 한적한 시골 마 을이면서도 동시에 경원선의 창 동역이 있어 경성(京城, 현 서울) 을 오가기에 힘들지 않은 곳이었 다. 이에 당시 민족 지도자들이 시 국이 불안해지자 어수선한 경성 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은둔지로서 선호하게 되었다고 한다. 창동역사문화공원에는 2017년 에 세워진 도봉구 평화의 소녀상 도 있다. 원조 인권변호사, 가인 김병로 옛 집터 김병로가 창동리로 이주한 것 은 신간회(新幹會)가 해체되고 사 상사건 변론에도 제약을 받게 된 1932년이었다.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가를 무료 변론한 인권변호 이재유를 체포하기 위해 동원된 변장 경관들이 이재유와 함께 찍 은 기념사진 이재유가 철길 건널목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녹천역 1번  출 구(이하 김학규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