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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주헌(宋柱憲)은 전남 고흥(高興) 사람이다.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진 다음인 1896년 1월, 호서(湖西)지방의 거유(巨儒)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백관형(白觀亨)·유준근(柳濬根) 등과 함께 홍주의병(洪州義兵)에 가담하였으나 곧이어 홍주관찰사 이승우(李勝宇)의 변심으로 주요간부들이 붙잡혀 의진은 해산되고 말았다.1905년 을사조약 늑결로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화되는 현실에서 수차에 걸쳐 상소를 올려 국권회복을 도모하려 하였다. 그 뒤 1919년에는 국제연맹(國際聯盟)의 주도로 파리강회회의(巴里講和會議)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호서·호남지방의 유림대표인 김복한·백관형·유준근·안병찬(安炳瓚)·고석진(高石鎭) 등과 함께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독립의 당위성을 천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때 영남에서도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동일한 취지의 청원서(請願書)를 작성하기로 한 사실을 알고는 두 지역 유림이 합동으로 독립청원서를 작성, 연명하기로 결정하여 파리독립청원서 서명자 137명 중 한 사람으로 연명하였다. 또한 같은해 3월에는 홍주의병항전 동지인 유준근·백관형 등 10여명이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고 또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됨에 미쳐, 융희황제(隆熙皇帝)를 복위케 함으로써 민심을 회복하고 독립을 달성하려는 취지에서 백관형·고석진·유준근·조재학(曺在學) 등 13명의 유림과 함께 융희황제에게 몰래 상소를 올리려는 계획을 추진하다가 비밀이 누설되어 일경에게 붙잡혔다. 같은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8개월간 수감되었다가 무죄 방면되었다. 출옥한 뒤에는 고사연구회(古史硏究會)를 조직하고 조선역사를 간행하였으며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가 귀국해서 유생의 충군애국정신을 선양하는 등의 활동을 벌이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부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