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page
106 2025년 10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① 구를 고립시키는 수단으로 이용 했던 것이다. 경춘선 출발지, 성동역과 친일파 이광수 성동역은 1939년 개통 이래 일 제의 민간자본이 주도하여 만든 사설철도인 경춘선의 출발역이 었다. 성동역은 ‘흥아(興亞)의 대 업을 완성시킬 황군적(皇軍的) 신 문화 창조’를 목표로 결성된 조선 문인협회의 회장으로 있던 이광 수가 박영희(간사), 김동환(간사) 을 비롯하여 일본문인 카라시마 타케시[辛島驍], 데라다 에이[寺田 瑛] 등과 함께 양주군 노해면 공덕 리에 있던 ‘지원병훈련소’(현 육군 사관학교 자리)를 방문할 때 출발 한 역이기도 했다. 특별지원병 제 도는 일제가 조선인에게도 징병 제를 실시한다는 목표 하에 1938 년부터 사실상 강제적으로 시행 한 제도이다. 방문 후 이광수는 잡 지 『삼천리』에 「지원병 훈련소 방 문기」(1940.5.1)를 남겼다. 이광 수는 이 글에서 ‘지원병’으로 중일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조선인 이인석 등을 거론하면서 조선인 에게 일본군 지원병에 적극 나설 것을 선동하였다. 청량리 만세운동 홍주의진(洪州義陣)의 의병 출 신 유준근(1860~1920)은 1919 년 3월 2일 백관형(1861~1928), 송주헌(1872~1950) 등 뜻이 맞 는 유생들과 함께 수창동의 한 여 관에서 순종 복위를 주장하는 상 서를 작성했다. 이들은 3월 5일 오후 4시경 청량리로 나가 금곡 에서 귀환 중이던 순종의 행렬을 헤치고 들어가 상서를 바치려다 담당자 송주헌이 체포되었고, 이 후 유준근도 체포되었다. 유준근 을 통해 우리는 3·1운동 시기에 이렇듯 왕정복구를 꿈꾸는 이들 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량리에서는 3월 23일에도 약 400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는 데, 이 과정에서 관공서와 민가 1 개소가 파괴되기도 했다. 청량리 에서는 3월 27일에도 500여 명 이 참석한 만세운동이 있었고, 인 근 회기리에서도 만세운동이 이 어졌다. ➒ ➒ 숭인학원 교사가 연루된 7월격문사건 검거소식을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1930.7.30) ➓ 장덕수 피살 소식을 전하고 있는 동아일보 기사(1947.12.4) ⓫ 성동역 터 표석(1호선 제기동역 2번 출구 뒤편) ➓ 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