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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➊ • 서울, 독립운동과 역사의 현장을 가다 ㉖ 105 서울대 문리대생들과 동성고 학 생들의 동참을 호소하기도 했다. 학생들은 12시경 학교로 돌아와 결의문을 낭독한 후 다시 시내로 진출하였다. 대광고는 4월 19일 당일 가장 먼저 시위를 시작한 학 교로 기록되고 있다. ‘7월격문사건’과 숭인학원 이효정도 한 때 교사로 일했 던 숭인학원은 제기동 일대 토 막민 밀집 지역 무산 아동의 유 일한 배움터였다. 1930년 7월 3 일, 숭인학원 교사이자 중앙청년 동맹동구지부 집행위원 조진우 (1908~?)는 중앙청년동맹동구지 부 집행위원장 김성배가 작성한 「친애하는 무산대중 제군에게 격 문함」이라는 제목의 격문을 숭인 학원 등사기를 활용하여 150매 를 인쇄한 후 경성부내 신문사, 신간회 본부와 전국의 신간회 지 부,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청년 총동맹, 근우회 등 여러 사회단 체에 우편으로 발송하였다. 경운 동 천도교교당 앞, 종로네거리 화 장실 안 등 시내 여러 곳에 게시 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당황했고, 이를 ‘7월격문사건’이라 불렀다. 1차 격문 발송과 게시에 성공한 이들은 2차 격문(「파멸당하는 백 의민족 민중에게 격한다」)을 준 비하던 중 체포되어 옥살이를 해 야 했다. ‘장덕수 피살 사건’의 현장 청설 장(聽雪莊) 1947년 12월 2일 한민당의 지 도자 장덕수(당시 정치부장)는 미 소공동위원회에 협조적이었다는 이유로 민족반역자로 지목되어 신설동 자택 청설장(제기동 149- 4)에서 괴한에게 피격당한 후 병 원으로 이송하였으나 사망하였 다. 범인은 박광옥과 배희범으로 밝혀졌고, 한독당 중앙위원 김석 황(1894~1950)이 배후로 지목되 었다. 나아가 미군 검찰은 제1회 공판에서 백범 김구가 이 사건에 관련되어 있다는 내용의 ‘피고인 진술서’를 증거로 제출 하면서 김 구의 출두를 요구하는 소환장을 발부하였다. 이 사건으로 김구는 미군정 법정에 증인으로 출두하 여 군정청 법무관의 심문을 받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다. 미군정은 장덕수의 불행한 죽음을 백범 김 ➏ ➏ 종연방적 동대문공장의 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이효정과 이병희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는 동아일보 기사(1933.10.19) ➐ 서울고무공장의 동맹파업 소식을 전하고 있는 동아일보 기사(1933.9.21) ➑ 7월격문사건으로 체포된 네 명 중 한 명인 숭인학원 교사 조진우(중외일보, 1930.7.30) ➐ 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