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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쿠바의 수도 아바나, 한국독립운동의 ‘화려한 외출’ 105 타이를 매고 일한다고 했고, 물을 마시지 않고 대신 우유 와 맥주를 마신다고 하였다. 1921년 한인들이 쿠바로 이 주한 이후부터 설탕 가격이 하락하여 설탕 1파운드의 가 격 20원 하던 것이 1원으로 떨어졌고, 사탕수수농장들 이 폐농을 하면서 한인들의 생활이 곤란하게 되었다. 박 창운의 주선으로 마탄사스 에네켄 농장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마탄사스에 정착을 하였다. 그리고 설탕 무역항인 카르데나스에서 에 네켄 농장에 일자리가 생기면서 한인들이 이주하 게 되었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도 한인들이 찾아 들었다. 한인들이 쿠바로 오게 된 것은 순전히 이해영의 주선에 의해서였다. 그는 아바나에 정착하여 가구 공장에서 칠을 하는 일을 했다. 아바나에 오는 한 인 동포들에게도 가구에 칠하는 일을 가르쳐 주고, 또 일자리를 구해주었다. 그래서 이종헌도 가구점 을 했고, 문부봉도 터키인 가구점에서 일을 하는 등 아바나의 한인들은 가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 았다. 멕시코에서 쿠바로 재이민 온 한인들 1921년 쿠바로 온 한인들은 모두 1905년 멕시코 유카탄으로 이민을 왔던 사람들이다. 제일의 고향은 ‘대한(大韓)’이요, 제이의 고향은 ‘유카탄’이다. 쿠바 아바나만 언덕에서 유카탄 반도를 바라보면, 그곳 이 바로 쿠바 한인들의 제이의 고향이었다. 쿠바는 한 인들에게 제삼의 고향이고, 그 제삼의 고향에 미주 한인들의 중심기관인 ‘대한인국민회’를 설립하게 되 었다. 1926년 현재 쿠바에 산재한 한인들의 인구수 는 다음과 같다. 아바나에 15명, 마탄사스에 108명, 카르데나스에 101명, 마나티 24명, 곤치다 14명, 가 마와니 10명, 모두 272명이 살고 있다고 했다. 1930 대한인국민회 아바나지방회 회관(Sol No. 409) 아바나지방회 3층에 있던 흥민국어학교 건물의  현재 모습(이상 필자 촬영) 대한인국민회 아바나지방회 회관(이종헌의 집, 12812 Esperanza y  Luisa, Quija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