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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100회) • 부산의 만세시위(2) 105 이들은 결국 3천원을 받아냈다. 오늘날 쌀 약 100 섬(1만 kg), 약2천만 원에 상당하는 큰 돈이었다. 이 후 신고가 들어가 ‘강도 및 보안법 위반죄’로 체포되 었다. 홍재문은 1921년 6월 3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강 도죄로 징역 10년형을 받았다. 그후 1924년 칙령 제 10호에 이하여 징역 7년 6월로 감형되었고, 1927년 2월 7일 칙령 제13호에 의해 징역 6년 6월 17일로 다시 감형되었다. 그의 출감일은 1928년 1월 18일인 데, 6개월 여를 남겨놓은 1927년 6월 22일 가석방되 었다. 당시 신문에 그의 출옥을 보도하고 있다. “대정 10년(1921년) 잡히어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위반 죄로 10년의 언도를 받고 부산형무 소에 복역하던 바 두 번의 감형을 받아 지난 20 일에 가출옥이 되어 동일 오후 10시경에 (밀양 군 밀양면) 삼문리 자택에 도착하였다는데 씨는  말하되, ‘저는 근 십 년 만에 집을 찾게 되니 처 음 내리어 집을 찾을 수 없어서 이집 저집 여러  집을 들여다보다가 지점만 어름하고 주인을 부 르니 마침 형님이 나오시기로 집을 들어오니 나 의 어머님과 동생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계시지  아니하니 부모에게 불효와 형제된 도리를 다 떠 났으니 다시 세상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고 목메인 말을 하면서 사십세까지 작 정하고는 어데 목표를 세우든지 노력을 하여 보 려 한다더라.(밀양)(『동아일보』, 1927.6.26) 8 · 15 해방 이후 홍재문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하 였다. 1946년 7월 21일 한국독립당은 남선고등여학 교 대강당에서 500 여 명의 당원을 기 반으로 부산지부 를 결성했는데, 홍 재문은 한국독립당 부산지부의 부위원 장으로 선임되었 다. 그는 1958년 7 월 15일 밀양 자택 에서 사망했다. 그 후의 부산 상황 1919년 4월 8일 오후 8시 30분 부산진 좌천동 일 대에서 약 2백명 군중이 두번째 일어나서 만세를 부 르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27일에는 부산진 역 남쪽 약 100미터 지점에서 오후 4시 25분 도착하 는 기차에 청년 약 30명이 돌을 던져 기차 창문을 파 괴하였다. 식민지 거점도시 부산의 만세시위는 대략 이와 같 았는데, 그중에서 청년 교사 홍재문이 만세시위 후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 징역 10년의 중형 을 받은 것이 이채로웠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3 ٠ 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 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을 역임했고, 현재 3 ٠ 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3 ٠ 1운동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 강연을 하고 있다. 필자 이정은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앞에 세워진 홍 재문 흉상(출처 디지털밀양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