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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의사 유창우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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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의사 유창우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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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산리 광복운동기념비 목민심서에서 청백리의 전형을 삼산 유정원이라 했는데 삼산선생이 개척한 마을이 이곳 삼산리이다. 원래는 문전옥답이 아담하게 펼쳐져 있었으나 안동댐의 물이 넘처 수물되고 북쪽 일부만 남아 선비의 역사와 독립운동의 실화를 증언하고 있다. 삼산선생의 후손들은 청백리의 유훈을 지키는 가운데 선비의 칭송을 듣은이가 많다. 유진휴 유도문 유술문 유병문 유미문 유리문 유치묵 유치익 유기진 유형진 유필영 유중식 유장식 유붕희등이 그들이다. 근대 백년에는 선비의 전통을 이은 독립운동가가 속출하였고, 현대에는 민주화운동에 몸 바친 인사가 많이 오늘날 새롭게 경향의 주목을 받고 있다. 1894년 갑오왜란과 이듬해의 을미사번으로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하자 서파 유필영선생은 자신도 의병에 도서기로 참여하고 유창식은 종사관으로, 유인식등의 문중 청장년을 모아 청량선에 진을 치고 의병을 일으켜 한국독립운동사의 막을 올렸다. 어어 함창, 태봉에 진주한 일본군을 공격하여 의병전쟁의 명성을 떨쳤다. 그 때 창식 인식 만식 삼종형제는 계몽주의운동으로 전환시켜 혁신 유림의 단서를 열었다. 천전리의 협동학교와 잔진리의 오산학교, 삼산리야학이 그의 유적이다. 전국적으로는 김대락 이상룡 이중업 장지연 박은식 신채호 김동삼 곽상훈등이 혁신 유림의 대표자들이다. 이와같이 삼산리 선비들은 독립운동의 선구자가 되었고, 독립운동도 처음에는 의병운동으로 시작하여 계몽운동으로 발전한 혁신 유림의 역사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서파를 중심한 삼산리 유림의 창안이었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지 온 문중과 안동의 선각적 지도가를 독려하여 망명길을 열어 독립운동 해외기지 개척을 착수하여 서간도에 신흥학교를 비롯하여 곳곳에 독립군 양성소를 설치하였다. 유인식이 경학사 교부장을 맡고 유연화는 연해주로 가고 유림은 북간도로 들어갔으며 유창식이 망명길에서 순국한 고사가 이때의 이야기이다. 유정희는 경술국치에 분개하여 상복으로 은거하였으며 일제에 항거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3.1운동이 일어났다. 유만식은 동후장터에 군중을 모아 만세시위를 하고, 서파는 면우 곽종석, 심산 김창숙과 더불어 전국 유림대표 137인의 호응을 얻어 파리장서를 서명하여 3.1운동을 민족운동으로 대성함과 동시에 혁신 유림의 역사를 완성하였다. 그 작업의 비밀장소가 침산정이다. 1904년 의병운동이 계몽운동으로 전환하면서 혁신 유림의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파리장서에 이르러 완성되었으니 혁신유림의 역사는 서파를 중심한 삼산리 유림에 의하여 시작되고 완성되어 이곳 삼산리가 그 역사의 고장이 된것이다. 삼산리 독립운동은 3.1운동을 계기로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유림과 유기준이 독립군을 거쳐 중경 임시정부 국무위원 또는 광복군으로 망명하여 활약했고 유기준은 끝까지 만주에서 광복군 제3지대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유림은 무정부주의운동으로 주목을 받았고, 1926년 유면희가 중앙고보 재학중 6.10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조선학생과학위원회 중앙 집행위원으로 활동, 동산의 장남인 준희는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곽상훈 김구경 박두숙등과 2년간 운영하다가 강제폐교 당하고 서파의 지시로 삼산리 야학을 침산정 인근에 유면희 유기태 유기복의 주동으로 동민이 힘을 모아 교사 다섯칸을 건립한 후 16년간 자력으로 유지하였으나 1940년 일경의 방화로 폐교되었다. 1924년 서파가 작고한 전,후에 동산은 이상재 유진태 박중화등과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 집행위원으로 교육문화운동과 조선노동공제회에 참여하여 노동운동을 전개하였고 신간회 안동지회를 설립하여 초대회장을 역임하였다. 그 후 신간회 안동지회에 유기태 유기만 유기복이 참여하여 영주, 봉화, 영양지회를 이끌고 향교철폐를 비롯한 유교혁신운동과 양력과세를 비롯한 전통개혁운동등 선구적인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유기만 유기일 형제가 안동청년동맹, 예안노농행동대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28년에는 동산 유인식선생도 고문 여독으로 작고하면서 삼산리에도 세대교체가 이루어 졌다. 그런 분위기에 전통적 애국주의는 점점 빛을 잃고 새 인물에 의한 신사상 신민족주의가 부상하여 새시대의 도래를 예고하였다. 그때 유기태의 고가인 전주유씨 삼산종택을 비롯하여 집집이 독립운동의 유적지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전국에서 삼산리를 찾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방문하였다. 그리고 삼산정과 침산정을 찾았으나 유서깊은 침산정은 간곳이 없고 옛 섭니 정신과 꽃핀 독립운동 정신만 고고하게 남아 통일운동정신의 기틀로서 청사를 빛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