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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선생은 단기 4211 무인 10월 6일 대동강 하류 도롱섬에 나시니 부 흥국 모 황씨의 3남으로 문성 안유 선생의 후손이라 선대는 평양부 남촌 노남에서 유학을 업으로 하다. 3세에 입학하야 당년 3권서를 떼다. 집은 가난하나 스승을 좇아 학문을 폐함이 없더니 17세 갑오에 신학문을 구하야 상경, 미국인 언더우드의 학교에 들어가다. 19세 병신에 독립협회에 가입, 서재필 박사의 훈도를 받고 평양에서 국권독립과 생활혁신의 사상을 고취하다. 쾌재정 연설은 그때이라. 구국의 길이 교육에 있음을 역설하야 고향에 전진학교를 세우니 사립학교의 효시라. 수 이랑의 황무지를 개간하야 노모 봉양의 자산으로 삼아 장형 치호에 바치고 22세에 부인 이씨와 함께 도미하다. 상항과 나성에서 고학 중에도 동포를 심방하야 원조와 지도를 폐하지 아니하니 모두 열복하다. 당시 하와이부터 다수 동포가 미 본토에 도미하야 일본인 노동 알선자의 착취에 신음함을 보고 이강, 재관 등 동지와 꾀하야 취직알선, 생활지도를 목적으로 공립협회를 조직하고 인하여 공립신보를 창간하니 북미대한인국민회와 신한민보의 전신이라. 병오 29세에 환국하니 보호조약 익년이라. 국운만회의 유일한 길은 교육과 산업의 진흥임을 역설하야 신민회와 청년학우회를 창립하니 실로 아국의 조직적 민족운동의 시초라. 당시 저명하던 애국자를 망라하였고 3‧1운동의 지도자 거의 다 이에서 나오니라. 평양 대성학교를 세우고 몸소 교장이 되어 인격주의의 교육에 신기축을 열더니 융희 3년 안중근 사건으로 일본헌병대에 구금되었다가 다음 해 봄에 석방되었으나 일본과 협력하는 정당과 내각을 조직하라는 두 차례의 일본의 요청을 일축하고 망명의 길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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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회의와 해삼위회의에서 불행히 독립운동 방략에 관하여 합의를 보지 못하고 선생은 미주로 돌아와 가주에서 수로 굴착 인부로 생계를 삼으니 흥사단의 구상이 이때에 되다. 곧 동포의 간청으로 국민회를 강화하야 몸소 중앙총회장이 되니 회세 크게 진작하여 하와이 멕시코와 멀리 시베리아 북만주까지 미쳐 엄연히 태극기를 지키는 한 국가의 모습이 있더라.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매 국민회는 이승만 박사에게 구미 외교를, 선생에게 원동 동포단결을 위임하니 선생은 기미5월 상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