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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羅喆,羅寅永)는 29세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훈련원(訓練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를 지내다가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관직을 사임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6월 동지 이 기(李沂)·오기호(吳基鎬) 등과 같이 일본에 건너가 정계요인을 역방하면서 "동양평화를 위해 한(韓)·청(淸)·일(日)이 동맹할 것과 일본은 한국에 대하여 선린의 교의로서 독립을 보장할 것"을 주장하였다. 귀국후에는 참정대신(參政大臣) 박제순(朴濟純)과 내부대신(內部大臣) 이지용(李址鎔)이 정권 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 폭발장치를 한 상자를 보내 이들을 처단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다시 오적(五賊)을 제거하기로 모의하고 동지규합과 자금모집에 진력하였다. 그리하여 박대하(朴大夏)·이홍래(李鴻來) 등과 같이 권총을 구입하여 수차에 걸쳐 이들의 처단을 시도하였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다시 재의거를 계획하였으나 서창보(徐彰輔)가 붙잡혀 사건전모가 폭로되자 평리원(平理院)에 자수하여 10년간의 유형(流刑)을 선고받아 그해 7월 12일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지도(智島)에 유배되었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후 그는 평소에 믿고 있던 단군성도(檀君聖道)를 숭상하여 항일투쟁에 힘을 기울이다가 민족갱생의 도(道)는 국조단군(國祖檀君)의 교(敎)를 부활함에 있음을 깨닫고 1910년 7월에 단군교(檀君敎)를 대종교(大倧敎)로 창교(創敎)하여 제1세 교주에 추대되어 김 헌(金獻)·윤세복(尹世復)·이원식(李元植) 등과 같이 활약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북만주 10여 개소에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을 펴는 한편 항일 구국운동에 헌신하다가 귀국하였으며, 1916년 9월 12일(음력 8월 15일)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에 입산하여 삼성사(三聖祠)에서 일제의 폭정에 대하여 울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동포에게 유서를 남기고 일왕(日王)과 일의회(日議會)에 견책의 장서(長書)를 보낸 다음 국가와 교(敎)를 위하여 자결 순사(殉死)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