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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118회) • 전북 익산의 만세시위(2) 103 문용기 지사를 기억함 한학을 공부한 데다 신학문을 공부한 문 용기 지사는 그 시대에 영어 통역자였고, 유 명한 연설가였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의 기가 있어 일본인들이 기가 질릴 정도로 위 압했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생전에는 고향 오산리에 새끼손가락 하나 도 들어오지 못하더니 그가 죽은 뒤에는 주 먹까지 드나든다”고들 했다 한다. 부인 최정자 여사는, 문열사의 눈은 “눈이 부실 정도로 정기가 서려 있어 감히 남편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지만. 자상하고 따뜻했 으며, 부모 형제들과 자녀들은 애중하게 여기는 장부 였다”고 회상했다. 광복 후 1948년 3월 1일, 이리 구시장에 문용기 지 사의 순국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앞면 글씨는 얼마 후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이승만 박사가 썼다. 기념식에는 민족대표의 일원인 임규가 내려와 조사(弔辭)를 낭독했다. 그날 문용기 와 만세시위를 하기로 약속하고 당일에 나오지 않았 던 노인이 아들 문창원에게 큰절을 하며 통곡했다. “문열사는 조국 광복을 위하여 비록 비참하게 죽 었지만, 오늘날 이렇게 영광을 받고, 나는 살아서 평 생 죄인으로 이렇게 가슴 아프게 산다.” 식장에 참석한 사람들도 그 소리를 듣고 따라 울었 다 한다. 오늘도 호남선, 전라선, 장항선이 교차하는 이리역 에는 태극기를 움켜쥔 채 쓰러진 문용기 지사의 외침 이 흐르고 있다. “나는 이 피로 대한의 신정부를 돕겠다!” 문용기, 그 이름은 지금도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 신은 대한의 신국민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3 ٠ 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역 임 했고,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을 맡고 있다. 3 ٠ 1운동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 강연을 하고 있다. 필자 이정은 1948년 3월에 세워진 순국열사비. 앞면의 한자 글씨는 이승만 전 대통 령이 썼다. 현재의 이리장터 만세시위 순국열 사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