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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의거 총지휘자로 추대하니 이 지방의 독립운동이 계획 추진되었던 것이다. 4월 12일 정오 십 수명의 군중들이 일시에 무계리 대청변에 모여들자 독립선언서의 낭독되고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고 시위에 들어선 흥분한 군중은 왜적의 헌병분견대를 포위하였으니 이 거사의 동지 손명조 김선오 김용이 등 3명이 적의 흉탄에 절명하기까지 하였었다. 그러나 이 지방민들은 겨레의 굴욕이 죽음보다도 참기 어려움을 통감 이에 벗어나려고 독립만세를 더욱 크게 외쳤으니 그 의가 하늘에 치솟고 남음이었다. 공은 거사 즉후 많은 동지들이 체포되었다는 말을 듣고 자진 헌병대에 들어서서 적을 통렬히 질책하였으며 또 이 거사는 오직 자기 한 개인이 계획했음을 역설 다른 이를 연계시키려 하지 않았고 2년여의 옥고를 치르면서 그 모진 고문에도 시종일관 의연하여 뜻을 굽히지 않았으니 모두가 그 절개를 우러러 보았다. 공이 처음 왜적 감옥에 갇히니 모부인께서 찾아와 사내가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추호도 굴하지 말라고 간곡히 분부하고 뒤에 다시 한글 만세가를 지어 격려하기도 했으니 세인이 모두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 하여 칭찬을 마지 않았었다. 공은 옥고에 풀려난 후 우분이 병이 되어 두문사세하더니 몽상에도 그리던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0년에 62세로서 그만 일생을 바쳤으니 참으로 애석하고 원통한 일이다. 아! 조국이 광복된 지도 어느덧 36년 남북의 통일을 온겨레가 갈망하는 이때 공의 겨레를 위한 자주독립정신은 후인의 거울이 됨으로 3.1동지회 김해지부에서 발의하여 공의 사적을 비에 새겨 길이 후세에 전할 뜻을 세워 동지회 권영섭 허용보가 나에게 글을 청하기에 공의 의거에 관한 문적을 상고하여 위와 같이 서술한다. 공의 휘는 승태요 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