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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명과 일신학교(현 병영국민학교) 교정에 모여 학생 및 주민 다수와 함께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뒤 손과 손에 태극기를 나눠들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다가 급거 달려온 일본 관헌에 의하여 일부는 체포 압송되고 강제 해산 당하였다. 절치부심한 지사는 동지들과 익일에 재거사할 것을 계획하고 동지 규합 책임을 맡고 농소 방면으로 가셨다. 그 익일인 4월 6일 오전 10시 드디어 노도와 같은 만세시위 군중에 놀라 달려온 일본 수비대가 무차별 사살, 구타, 체포하는 광경을 보고 격분한 지사는 이들이 내밀고 있는 총검 앞에 가슴을 헤치며 "쏠테면 쏘아라"하고 대들자 일본군도 감히 쏘지 못하고 그 기백 앞에 그만 기가 꺾이고 말았다. 동년 5월 초에 피체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하고 대구감옥에서 2년간의 옥고를 치룬 뒤 항일운동을 계속하기 위하여 만주 망명을 시도 함경북도 단천에 은거 중 적발되어 거주 제한 구역인 향리로 압송되셨다. 향리에 돌아와서는 함께 옥고를 겪은 복역자 전원과 함게 기미계를 조직 4월 6일 그날 순국하신 엄준. 문성조. 주사문. 김응룡 네 분의 추모제를 매년 봉행하였다. 1944년 6월에는 소위 대동아전쟁에 광분한 일제의 신사참배 놋쇠 공출 등의 강요에 불복하다가 또다시 울산 경찰서 유치장에서 20여일간 구금의 고난을 겪기도 하셨다. 1957년 6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