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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2026년 3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① 장을 맡았으며, 제2회 정기대회 를 앞두고 한용운이 사퇴하는 바 람에 유진태(1872~1942)가 회 장, 허헌이 부회장에 당선되었다. 1929년 1월의 임시대회를 통해 서는 허헌이 회장, 홍순필이 부회 장에 당선되었다. 3·1운동 당시 지하신문을 주도한 사람들 1919년의 3·1운동 당시 발간된 『조선독립신문』, 『반도의 목탁』과 같은 지하신문은 3·1운동이 전국 으로 확산되고 지속적으로 전개 되는 데 큰 역할을 한 요소의 하나 였다. 청진동(31번지)에 살던 장종건 (1895~1966)은 『조선독립신문』 의 초창기 발간에 주요 역할을 한 인물이다. 『조선독립신문』 1호는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광사 에서 찍었지만, 주요 인물이 체포 되고 보광사는 폐쇄되었다. 장종 건은 체포를 면한 이종린의 부탁 을 받고 2~4호를 자신이 근무하 는 경성서적조합 사무실에서 발 간하였다. 장종건은 이후 광화문 통에 사는 최치환, 임승옥 등과 함 께 유병륜의 집(광화문통 85번지) 에서 5호와 6호를 발간하였고, 견 지동 이인열의 집에서 7호를 발 간하였다. 이어 공덕리 남정훈의 집에서 8호와 9호를 연이어 발간 하던 중 체포되었다. 해방정국의 김약수 집터와 국회 프락치 사건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북성회(北星會), 조선공산당 등 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약수 (1890~1964)는 1948년의 5·10 총선을 통해 구성된 제헌국회에 서 국회 부의장으로 있었다. 김약 수가 1949년 6월의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되어 수난을 당할 때 청진동(144번지)에 살고 있었 다. 국회프락치 사건은 친일파 청 산을 위한 반민특위 활동을 둘러 싸고 이승만과 대립하고 있던 13 명의 소장파 의원들을 남로당 등 의 지령을 받고 ‘주한미군 철군과 미군사고문단 설치 반대’를 주장 한 프락치라는 이유로 기소하여 징역 3~10년을 언도한 사건이다. 국회프락치 사건이 친일 청산 을 위한 반민특위 활동에 제동을 걸기 위한 이승만 정권의 조작 사 ➍ ➍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신간회경성지회 3주년 기념식 장면(『조선일보』 1930.6.18) ➎  장종건이 발간을 주도한 『조선독립신문』 제6호(국사편찬위원회 제공) ➏  3·1운동 당시 『조선독립신문』 발간을 주도한 장종건의 「일제감시대상인물 카드」 ➎ 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