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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2025년 9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3월의 전설(118회) 이리장터 시위 4월 4일 낮 12시 반, 이리 구시장. 400여 예수교인 을 중심으로 문용기, 박성엽(朴成燁)은 붉은색으로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커다란 깃발을 앞세우고, 전 창여(全昌汝)와 박동근(朴東根)은 독립선언서를 대중 에게 배포하였다. 모여든 사람이 1천여 명에 이르렀 다. 독립만세 소리가 이리 천지를 진동했다. 문용기는 태극기를 들고 연설했다. 일본군이 태극 기를 든 오른팔을 쳤다. 그는 곧바로 왼손에 태극기 를 쥐고 다시 외쳤다. 그러자 총검이 가슴을 깊이 찔 렀다. 붉은 피가 쏟아졌지만 그는 끝까지 만세를 부 르며 쓰러졌다. 조선인 헌병 보조원이 총 개머리판 으로 뒷목을 쳤다. 문용기는 눈을 부릅뜨고 호령하 며 앞으로 쓰러졌다. 제자 김병수가 문용기를 응급 치료하려고 하자, “너는 누구냐!” 하며 소방 갈고리 로 머리를 찍었다. 그 흉터가 평생 그의 머리에 남아 있었다. 당시 군산에 주재하던 선교사 윌리엄 불(William F. Bull, 한국명 부위렴)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일제 헌병 앞에 서) 시위 지도자는 가슴 을 내민 채, “죽일 테 면 죽여라. 그러나 내 입에서 만세 소리 만은 막지 못한다” 하였다. 군인이 칼을 뽑아 그의 가슴을 찌 르자 그는 피를 쏟으 며 땅에 넘어졌다. 가슴에 꽂았던 칼을 빼는 군인을 향해 그는 “네가 나를 죽인다만 하나님 께서 이 일로 네 나라를 벌주실 것이다”라고 외쳤다. 남겨진 가족의 눈물 채 숨을 거두지 않은 문용기를 정영진의 부친이 들 쳐업고 문애미까지 오자, 사람들이 들것을 마련하여 눕혀 집에 도착하였다. 어머니는 장남이 피를 낭자하 게 흘려 처참한 모습을 보고 혼절을 거듭하다 약 1년 뒤인 1920년 2월 6일 세상을 떠났다. 딸 용주도 충 격을 받아 앓다가 할머니 사후 3일 뒤에 숨을 거두었 다. 4살 난 딸 또한 얼마 후 죽었다. 그리하여 한 집안 4명이 잇달아 목숨을 잃었다. 부인 최정자 여사는 아들 문창원을 감추고, 남편의 피 묻은 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치마폭에 싸서 항아리 에 넣어 땅에 묻어 감추었다. 부인은 감춘 옷이 썩을 까봐 밤에 몰래 꺼내 바람을 쏘이고 사랑방 처마 밑 에 감추어 보관하느라 무진 애를 썼다 한다. 이 옷을 며느리 정귀례가 물려받아 보관하다 독립기념관이 개관하자 기증했다. 문용기 열사의 피묻은 두루마기 문용기의 피묻은 저고리(이상 독립기념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