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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2024년 3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3월의 전설(100회) 부산의 만세시위(2) 1919년 4월 3일 부산진공립보통학교 학생 · 기독교 부인 등 100여 명 독립만세 시위 전개 교사 홍재문 큰 역할, 후일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 등 독립운동 좌천동 만세시위와 교사 홍재문의 독립운동 글  이정은(본지 편집위원, 3 · 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식민지 침략의 거점 부산 부산은 일제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화의 교두보이 자 거점도시였다. 3 · 1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에 부 산 인구 7만 4,137명 중 한국인이 4만 3,423명, 일본 인이 3만 499명, 그 외의 외국인이 215명이었다. 인 구의 41.1%가 일본인이었다. 시가지 부분만 한정해 보면, 일본인이 78.9%를 차지하고 있었다. 일본인 비 율의 전국 최고 시가지는 군산과 신의주(100%)였다. 이 두 도시를 빼면 부산이 전국 최고의 일인 집중 진 출 도시였다. 이런 식민지 침략과 일본인 집중 거주 도시야말로 일제 침략의 최전선이 아닌가? 이런 곳에서 대규모 의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났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 되지 않았다. 필자가 지방사회의 독립만세 시위 사례 를 여러 곳 현지 조사했었다. 그 결과 독립만세 시위 는 일제의 식민지 침탈 정도나 수탈 강도가 좌우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 사람이 땅 한 평 갖고 있지 않은 지역에서 강력한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이 많았다. 문제는 저항을 조직화할 수 있는 지역 공동체의 응 집력,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주체와 힘이 있느냐, 그 힘이 얼마나 강한가에 좌우되었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그러므로 주재소나 관공서가 있는 읍내 이번호 연재로 ‘3월의 전설’이 100회를 맞이하였다. 그동안 100회에 이르기까지 귀중한 원고를 거의 매월 빠짐없이 작성 ·  게 재해주신 이정은 박사께 감사드린다. 3 · 1운동 105주년에 즈음하여 3 · 1운동에 헌신 · 희생하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께  다 시 한번 감사드리며, 3 · 1운동과정에서 보여준 민족 대통합과 단결, 정의 · 인도, 세계 평화와 ‘공화’의 이상과 의미를 깊이  되 새겼으면 한다(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