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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梁山) 출신으로 일본 동경(東京)에서 재일 유학생들이 거행한 2·8독립선언식의 11명 대표중 한 사람이다. 일제에 의해 조국이 병탄되자, 재일 유학생들은 항상 조국 광복의 꿈을 키워 왔는데, 1916년 4월 17일 당시 재일 유학생은 모두 5백 24명으로서 일본경찰은 유학생들을 항일의식을 기준으로 하여 갑·을로 철저하게 감시하였다. 특히 재일 유학생들은 각종 비밀결사 단체를 통하여 조국 광복을 위해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그는 1915년 12월 신익희(申翼熙)·김양수(金良洙)·장덕수(張德洙)·최두선(崔斗善) 등이 발기하여 창립한 조선학회(朝鮮學會)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1918년 1월 17일의 간부 개선 때 간사로 선출되었다. 이 해 12월 하순, 동경 조선기독교 청년회(東京朝鮮基督敎靑年會) 주최로 Y.M.C.A. 강당에서 웅변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때 연사로 나온 서 춘(徐椿)·이종근(李琮根)·김상덕(金尙德)·윤창석(尹昌錫) 등은 한결같이 민족자결주의 원칙 아래 자주독립을 획득할 것을 주장하였다. 웅변대회가 끝난 뒤, 유학생들은 해산하지 않고 조국 독립운동의 방안을 강구하였는데, 이 때 그는 최팔용(崔八鏞)·백관수(白寬洙)·김철수(金喆壽)·이광수(李光洙)·송계백(宋繼白)·최근우(崔謹愚)·서 춘·이종근·김상덕·윤창석 등과 대표위원으로 선발되어 그들과 함께 일제의 감시를 피해가며 회합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신호(神戶)에서 영국인이 발행하던 영자신문인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의 1918년 12월 1일자 기사에 이승만(李承晩) 등의 한국대표가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들은 재일 유학생들은 이듬해 1월 상순에 모임을 갖고 최팔용·윤창석·송계백·최근우·백관수·김상덕·서 춘·전영택·이종근·김도연을 유학생 대표로 선출하여, 2월 8일을 기하여 재일본 동경 조선독립 청년단(在日本東京朝鮮獨立靑年團)의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본국의 민족 지도자들과의 연락을 위해 1월 중순에 송계백을 서울에 파견하였다. 이 때 그는 마침 전영택이 신병으로 유학생 대표에서 탈락하자, 이광수와 함께 11명 실행위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2월 8일 오후 2시, 4백여 명의 유학생들이 학우회 총회를 빙자하여 모두 Y.M.C.A. 강당에 모이자, 학우회 총회 의장인 백남규(白南奎)의 개회선언, 최팔용의 조선 청년 독립단 발족 동의, 김도연의 결의문 낭독을 마치고 서 춘이 연설을 하기 위하여 등단할 무렵, 동경 경시청에서 출동한 일본 경찰이 진입하여 해산을 요구하였다. 이에 흥분한 유학생들과 일본 경찰과의 격투가 벌어졌으나, 대다수의 참석 학생들이 체포되었는데, 그도 이때 체포되어 서신전(西神田) 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경시청으로 이감 기소되어, 이 해 6월 26일 제2심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혐의로 9개월 금고형을 선고받고 동경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3년 10월 18일 조선청년 연합회 위원장으로 피선되어 1925년 10월까지 재일 유학생들의 독립운동과 물산장려 운동을 주도하는 등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