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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119회) • 황해도 연백군 만세시위(1) 101 최은영의 상고는 단순한 개인의 항변을 넘어, 독립 운동의 정당성을 법정에서 공적으로 천명한 사례였다. 호동면 주민의 연안 시위 3월 16일, 연안면 동쪽 호동면 나진포리에서 김각 배(金珏培), 유원권(柳遠權), 장순영(張順英) 등이 주민 70명을 모아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오후 1시 30분경 연안읍 남문에 도착했으며, 시위대는 100명 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헌병과 일본인 재향군인들이 이를 저지하고 총칼로 위협해 11명을 체포하였다. 밤이 되자 교회 종소리가 울리고, 읍내 동문안, 서 문안, 교회당 세 곳에서 동시에 300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경찰은 다시 2명을 체포했으나, 주민들의 항의와 함성은 그칠 줄 몰랐다. 맺음말 연백군의 3·1운동은 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서 가 퍼져 나가면서 면 단위에서 봉기한 주민들이 읍내 로 모여드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일제는 헌병과 재향 군인을 동원해 이를 탄압했다. 그러나 체포와 탄압에 도 불구하고, 연백 사람들의 만세 함성은 꺾이지 않 았다. (다음 편에서는 연백읍 대규모 만세시위, 조선총독 부 당국의 탄압, 그리고 체포된 인물들의 행적을 살 펴본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3 ٠ 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역 임 했고,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을 맡고 있다. 3 ٠ 1운동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 강연을 하고 있다. 필자 이정은 호동면 만세시위 주동자 유원권 (징역 1년 8월, 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연안읍 연성리에 있던 연백군청 연백군 시위 상황을 조선총독에게 보고한 황해도 장 관 신응희(1859 ~1928, 나무위키 제공). 그는 일본  육군의 군사교육기관인 도야마[戶山]학교를 졸업한  친일파 관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