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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118회) • 전북 익산의 만세시위(2) 101 교사에서 통역으로 문용기는 아카데미 졸업 후 영명학교 영어교사로 돌아왔다. 그러나 조국은 이미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다. 문용기는 학생들에게 철저한 민족정신과 독 립정신을 일깨우며 회초리도 마다하지 않고 엄하게 가르쳤지만, 학생들은 그를 존경했다. 그는 고향 사람들에게도 집 주위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도록 장려하고, 위생관념을 가르쳤으며, 문 맹퇴치를 위해 봉사했다. 자신도 손에서 영어 단어장 이나 책을 놓지 않았다. 그런 문용기를 보고 원근에 서 큰 인물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후 그는 교직을 사임하고 함경남도 갑산의 광 산에 미국인 통역으로 갔다. 갑산 광산은 갑산군 진 동면 동점리와 대복리의 동광산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광산은 1909년 4월 미국인 회사가 광업 권을 얻어 조사와 채광을 하면서 통역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만세시위 준비 1919년 3월, 서울에서 3·1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리 역전 근방 여산여관을 근거지로 교회 인사들과 동지들을 규합하며 시위 를 준비했다. 일본인 대농장들이 있는 이리 경비를 위해 일본군 증원부대가 파견되고, 일본 거류민들로 자위단을 조 직했다. 경계가 강화되면서 독립운동을 추진하기가 매우 어려워졌음에도 문용기는 물러서지 않았다. 4월 4일 이리장날을 거사일로 잡았다. 여관 제일 깊숙한 방에서 밤에는 검정 천으로 창의 불빛을 차단 하고 의논을 했으며, 부녀자들은 밤을 새워 태극기를 그렸다. 거사 전날 밤, 문용기는 가족들을 불러 모으고 말 했다. “내가 주모자로 잡혀가 감옥살이를 하게 되면 집 안 대소사를 잘 부탁한다.”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9살 난 딸 용주가 바짓가랑 이를 붙잡고 떼를 썼다. “아빠, 나 학교에 가고 싶어. 학교 보내 줘.” “아버지가 다녀와서 보내 줄게.” 그것이 딸과 나눈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다, 부인 최정자는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가만히 뒤 를 따라갔다가 집안을 돌보기 위해 돌아왔다. 문용기가 영어를 배운 목포 영흥학교(1903년  개교)  목포 영흥학교의 1922년 4월 브루스 커밍 교 장 전별 기념 사진. 뒤의 건물은 알렉산더가 기 부하여 지은 것이다. 익산군 익산면 이리(솜리)장터 만세시위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