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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동남아지역에서의 한국독립운동 101 원래 여운형은 만찬에 참석한 3일 후에 배를 타 고 출국할 예정이었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필리핀 측으로부터 승선을 정지당한 후, 여권을 압수당하고, 마닐라의 중국기독교 청년회관(Chinese YMCA)에 억류되었다. 여운형의 억류에 대해 중국영사관과 화 상총회, 법조계, 신문기자 등 각계 인사들이 연합 항 의를 하였다. 그 결과 미국경찰서장이 사과편지를 보 내어 “일본인이 요구하여 그리한 것이니 만분(萬分) 양해(諒解)하라”며 경찰서에서 손해를 물게 하였다. 필리핀에서 한국독립운동 모색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 립된 이후, 1920년 6월 21일 당시 임시정부의 노동 국총판을 맡고 있던 안창호에게 내무총장 이동녕 이 찾아와, 장차 정부의 위치를 필리핀으로 옮기자 고 하였다. 그러면서 도산에게 필리핀을 한번 시 찰 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당시 임시정부의 사정을 고려하여 수락하지 않았다. 『도산 안창호 일기』에는, “차차(此次)에 비율빈(比律 賓)에 왕(往)하면 불시(不時)의 비(備)로 해(該) 총독부 (總督府)에 교섭”하겠지만, “지금 차(此)를 행(行)하면 경제가 불허(不許)하고, 또는 인심(人心)의 영향이 다 대(多大)할지니 유시(由是)로 대사(大事)의 타격이 될 지니 불가(不可)하다”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외무총장 대리차장 정인과(鄭仁果)가 다시 찾아와 안창호의 필리핀행을 준비했지만, 당시 여건상 이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왜 이동녕이 필리핀으로 정부를 이전하자고 했는 지 그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중국에 서 활동하던 독립운동자들은 국내와의 관계, 국제적 마닐라 주재 독일영사가 마닐라에서의 여운형의 활동에 대해 보 고한 보고서(1929.6.6) 한지성의 기고문 「조선의용대 3년래의 공작 총결」 원문. 조선 의 용대 통신처 설치를 언급하고 있다(『조선의용대 통신』 제10기,  1941년 10월,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