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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녹두장군전봉준을외치다 매일 아침‘캠퍼스로 가는 길’을 들으며 등교를 하고, 나른한 점심이면 노천에 앉 아‘함께하는 민중가요’를 따라 불렀으며, 저녁 무렵엔‘클래식 가든’이 흐르는 도서 관 앞을 지나 방송국으로 향하는 일과가 반복되었다. 그리곤 늦은 밤이 다 돼서야, 우 린어두워진숲을헤치고나와교문을나섰다. 당직에, 제작 회의에, 모니터에, 녹음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방송이 주는 즐 거움과매력은상당했다. 교내스피커를통해들리는내목소리는낯선만큼신기하기 그지없었고, 시그널 음악의‘땡’소리에 맞추어‘경희종합뉴스’의 타이틀을 끊을 때는 팽팽한긴장과스릴이있었다. 그전까진냉랭하기만했던선배들도단체로다중인격 을 뽐내며 급 친절모드가 되었고, 쉽지 않은 방송국 생활을 해나가려면 강하게 키울 수밖에 없었다는 그들의 속내를 이해할 만큼 우리는 어엿한‘송국인’들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또한 후배들을 받으면서 재수 없는(?) 선배들의 대를 자진해서 이어갔으리라. 그러던어느날아침‘캠.가’를생방으로진행할때있었던일이다. 동기 PD 은영이에게 원고를 받아보니, 녹두장군 전봉준의 이야기가 그날의 화두 였다. 비록 실패는 했지만 동학농민운동을 열정적으로 이끈 전봉준의 뜻을 기리고 정 신을계승하자는내용이었다. 생방이었기에 일단 나는 씹지 않고 매끄럽게 멘트를 소화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는 데, 큐시트에 여섯 번이나 반복되는 그 놈의‘녹두장군 전봉준’의 까다로운 발음은 날 몹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몇 번 읽어보지도 못하고 생방 큐사인이 떨어졌고, 나는 멘 트를 읽어 내려갔다. 다행히 네 번째까지는 비교적 선방했다. 그런데 다섯 번째 전봉 준에서 발음이 약간 꼬였고 이에 크게 당황한 나는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장식하고야 말았다. “노뚜장군 덤봉중 (이런 망할…) 우리는 그를 오랫동안 거역 (미쳤구나!…) 아니, 기 억해야할것입니다.” 기별 Essay | 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