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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암 김재계 선생은 고종 2년(서기 1888) 4월 25일 전남 장흥군 대덕면 신상리에서 김규현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소년 시절 향제에서 수학하고 성년에 이르러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이제 청운의 뜻을 품고 상경하여 손병희 교주의 사훈을 받았고 교단의 구국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때마침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된 이준 열사 일행의 여비를 조달하였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3.1운동에 장흥대표로서 그 경비의 보강에 기여하였다. 그러는 중에 천도교 중앙총부 경리위원 김?관장 감시원장 등의 중책을 역임하였다. 향리에 양영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추진하였고 교풍회를 조직하여 국민사상을 계몽하였으며 천도교월보와 개투지에 논설을 펴내서 민족정신을 선양하였다. 을사조약의 당시 순사한 문충정 공의 비보에 3일동안 금식으로 한탄하였고 대한독립을 염원하는 기도문을 작성하여 몸소 주송하며 이를 널리 유지에게 배포하였다. 항일투쟁으로 국권의 회복에 충성을 다한 중에 특히 이른바 내선일체라는 말에 굳거히 반대하였고 천도교단의 독립운동에 암약한 소이로 동지 네 분과 함께 일제경관에게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에 인한 병환으로 보석된 지 미구에 단기 4271년(서기 1928) 6월 27일 경성 종로구 옥인동에서 순국하니 온 국민의 애탄은 그지 없었다. 오늘날 향리에 살고 있는 유족의 영광을 바라거니와 이제 우리 향토 유지들은 김재규 열사의 유덕을 추모하고 여기에 기념비를 건립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