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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아드님 인기는 공판을 거쳐 판돈녕부사가 되고 증령의정시는 충간이다. 아드님 휘 ?는 한성판 윤지돈녕부사가 되었으니 곧 공의 10조이며 현손 휘 만겸공은 죽장 입향조가 되신다. 조 휘 연립은 수계희선이며 고휘는 민서이고 비는 평해황씨 영종의의 따님이다. 1880년 고종 경진에 태어나시니 천성이 관후하면서 의지가 굳어 외유내강의 전형적의사였다. 당시 왜적의 강압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이듬해인 1906년 3월에 고종의 밀지를 받아 풍전등화 같은 나라를 구하고자 산남의진을 창의하였다. 그때 참모장 손영각은 빙장이요 중군장 구한서는 재종숙이요. 소집장 권대진은 사돈간이다. 공은 20대 후반의 장년으로 진영의 비밀연락과 군수품조달의 참모로 보현산 동대산을 거점으로 한 사령부와 참모부 사이에서 활동하였으니 이는 일가친인척의 위국단성이다. 그 후 전열을 가다듬고 와신상담의 기회를 노리다가 1907년 9월 입암전투에서 병력과 무기의 열세로 대패하고 대장과 고위간부가 전사하는 비운을 겪었다. 잔여의병은 유격전을 벌리다가 해진되고 종사는 종말을 고하였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으랴. 치열한 전쟁의 과중에서 겨우 연명한 공은 굴욕의 한을 품은채 향촌에 은거하여 여생을 보내면서 당시 창의독행 사실을 가슴에 품고 일정하에 노출하지 않는 우국심의 미담도 남겼다. 광복된 조국의 하늘 아래 떳떳하게 살다가 1950년 11월 1일 서세하고 가사리 전기점손좌에 안장하였으며 배는 경주손씨 영각의 따님이다. 사후 반세기가 지난 오늘 건국포장 2268호로 서훈하였으니 만년의 탄인들 어이없으랴. 3남5녀를 두었으니 남은 승자 영자 익자이고 녀는 이종희 권석근 정진만 이유원 김헌귀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