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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2025년 10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3월의 전설(119회)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3월 2일 연백읍내 기독교 전도사 신자도가 교도 들 사이를 찾아다니며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또 이에 설명을 덧붙여 이번 거사에 힘을 다하라고 권 유하였다.” 연안읍에서는 3월 13일 만세시위를 계획했으나, 경찰이 사전에 탐지하여 무산되었다. 그러나 이미 선언서는 민들레 홀씨처럼 퍼져 나갔고, 곧 각 면에 서 주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봉북면 주민의 연안 시위 1919년 3월 15일, 봉북면 원동리의 김덕배(金德 培, 35세)와 용남리의 김종석(金鍾奭, 21세)은 전국적 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난다는 소식을 듣고 의기투합 했다. “연안 읍내로 가서 만세운동을 일으키세!” 그들은 각각 마을 주민을 모아 출발했다. 김덕배는 원동리 주민 약 15명을, 김종석은 용남리 주민 10여 명을 이끌었다. 도중에 동광리 주민들이 합세하여 시 위대는 30명가량이 되었다. 오후 2시경 시위대는 연안 읍내 동문 밖에 도착하 였다. 그들은 떡과 술을 사서 허기를 달랜 뒤, 3시경 태극기를 앞세우고 읍내로 진입했다. “조선독립만세!” 우렁찬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자 읍내 주민들이 가 세했고, 시위대는 100명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헌병 이 출동하여 주모자로 보이는 9명을 체포하고 군 중 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날 상황은 신응희 황해도장관의 보고서에 다음 과 같이 기록되었다. “3월 15일 오후 3시경 연백군 봉북면 폭민 수십 명이 읍 동문으로부터 구한국 국기를 들고 침입해 왔으나, 헌병이 시위대를 저지하고 주모자 9명을 체 포하였다.” 한편, 일본 육군 차관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는 3 월 21일 보고에서 당시 시위 참가 인원을 약 100명 으로 기록하였다. 금산면의 만세시위 같은 날, 연백군 최북단 금산면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은산리 농민 최은영(崔殷永, 27세)은 성두 동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 헌병에 체포되었다. 그는 재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았으나 끝까지 불 복했다. 6월 19일 고등법원 판결문에는 그의 상고 이유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서울에서 독립선언이 있자, 먼 시골의 남녀와 노 소가 혹은 시장에서, 혹은 촌락에서 독립만세를 부 른다는 소식을 듣고, 나 역시 조선 민중의 한 사람으 로 기뻐서 만세를 불렀다. 이는 인도와 정의, 생존과 존영을 위한 것이며 배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 다. 그러므로 판결에 불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