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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2025년 9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3월의 전설(118회) 전북 익산의 만세시위(2) - 이리장터 시위 순국자 문용기 1919년 4월 4일 익산군 이리장터 1천여 명 만세시위 문용기, 신학문에 눈뜬 뒤 군산 영명학교 교사 등 근무 이리장터 만세시위 주도하다 장렬히 순국 “이 붉은 피로 우리 대한의 신정부를 돕겠다” 외쳐 어머니와 두 딸도 충격받아 잇달아 숨져 글  이정은(월간 『순국』 편집위원,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붉은 피의 외침 1919년 4월 4일, 익산군 이리장터는 1천여 명의 만세함성으로 뒤덮였다. 문용기(文鏞棋)는 손에 태극 기를 들고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 하는 연설을 했다. 일제가 그의 오른손을 쳐서 태극 기를 땅에 떨어뜨렸다, 그는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 를 주워 들고 만세를 부르며 나아가는데 다시 왼팔 을 내리쳤다. 이어 총검이 문용기 왼쪽 가슴 깊이 박 혔다. 그는 붉은 피를 흘리며 외쳤다. “여러분, 여러분, 나는 이 붉은 피로 우리 대한의  신정부를 도와 여러분이 대한의 신국민이 되게 하겠 소!” 신학문에 눈뜨다 문용기는 1878년 5월 19일 전북 익산군 오산면 오산리 310번지 남평 문씨 집안에서 문재윤(文在 允) 과 김씨(金氏)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낮에는 논 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독학으로 한학을 익혔다. 20 세를 전후하여 한학을 가르치다 24살 때부터는 6년 동안 군산에 있는 영명학교에서 한문과 의무교사(생 활지도교사 격)로 근무했다, 문용기는 나이 서른에 신학문을 공부할 결심을 했 다. 전남 목포에 있는 존 와킨스 중학에 입학했다. 존 와킨스 중학은 1903년 9월 15일 미국 남장로교 선교 사 유진벨(Eugene Bell, 1868~1925)이 목포에 설립 한 목포남학교로 1914년 영흥학교로 이름을 바꾸었 다. 이 학교는 1907년 중학부를 신설하고, 이듬해 미 국 교회의 후원으로 근대식 건물을 짓고 존 왓킨스 아카데미라 불렸다. 문용기는 1907년경 중학부를 신 설할 때 입학한 것으로 보인다. 문용기는 그곳에서 3 년 동안 공부하고 1911년 제1회로 졸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