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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유린되었다. 조국광복의 웅지를 품은 지사는 횡행 남선북마로 동지규함에 힘쓰더니 마침 33인대표가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만세시위를 벌리니 이를 도화선으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요원의 불길같이 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에 호응하여 안동 예안 전병우 이상동 강대극 김원진 조수인 신상면 이시교 이중원 이광호 김형진 김창옥 김화영등 여러 동지중 예안인사는 3월 11일 밤 9시에 예안면사무소 숙직실에서 면장 신장면을 위사하여 이시교 이원중 이남호 백남학등이 박지사와 함께 밀의 3월 17일 예안장날을 이용하여 일대 만세운동을 전개할것을 결의하고 즉시 등사판으로 대량의 격문과 독립선언문 태극기를 만드는 한편 각부락별로 군중ㄷ공원을 담당하고 시위 당일은 동지 김형진 김두진 김화영 김창락 이유홍과 사전에 각부락에서 동원된 위장 장꾼 수천명이 운집 오후 3시 30분부터 일대 시위운동을 시작하고 700여명의 백의 군중을 선두로 휘날리는 태극기는 창공을 뒤덮었으며 고창하는 만세소리는 천지를 진동시켰다. 사기충천한 의거군중은 지사를 선두로 선도자 30여명은 시장뒷산 의성산에 일인이 세운 소위 대전기념비를 쓸어트린후 그 장소에 태극지를 높이 세우고 이를 신호로 만세를 부르며 시장을 누볐다. 예안우체국에서 주재소까지 시위행진중 일인 결찰 조전등길이란자가 군중을 유포 주재소로 연행하자 박지사는 격분 군중의 선두에서 주재소로 달려가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자 이에 불응 제지함으로 유리창을 부수며 건물을 파괴하고 경찰 3명을 포로로 군중앞에 세우고 계속 만세를고창하며 시장을 행진하였다. 오후 7시까지 시위가 계속되던중 안동에서 출동한 수비대와 경찰이 총포를 난사하며 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도한 박지사는 금형진 김두진 김업영 김창락 이유홍과 함께 안동으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과 고통으로 안동감옥에 구금중 동년 5월 3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다시 대구감옥으로 이감 대구복심법원을 거쳐 동년 7월 12일 대구 고등법원에서 안녕질서방해 보안법위반이란 죄명으로 최종 징역1년을 선고받고 계속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른후 익년 1920년 7월 12일 출옥시에는 그동안의 고문과 학대로 거의 빈사상태가 되어 당시 통지를 받고 달려간 친지 구명이 보호동행하였다. 그후 조국광복시까지 일경의 감시와 압박으로 ㄱ고통당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다시 좌우익의 분렬과 동족 싸움으로 국내가 혼란에 빠지고 고대하던 조국통일을 보지 못한채 1949년 기축 12월 26일 향년 55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당시 지방치안이 극도로 혼란하여 고향 선산하에 가지 못하시고 만거지인 와룡면 이상동 뒷골 전중에 안당하였다. 배위 청주한씨 춘갑여사는 문철의 따님으로 1893년 계사 3월 8일생이며 1942년 임오 11월 6일 졸하자 지사의 출생지인 예안면 단진리 가래골 상등선산하에 모셨다. 장자 도숙의 처는 안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