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page
10 2025년 10월 Column 명사 칼럼 작은 소리 큰 울림 가는 지식인으로서 도덕적 순결성을 지키려는 의지 를 담았다는 것이다. 특히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 해야지”라는 대목에 관해, 문학평론가들은 이 시의 핵심이라고 논평한다. 일제의 폭압 아래 특히 조선 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언어도 성명도 관습도 문화도 죽어가는 가슴아픈 현실을 직시하며, 그는 그 모든 것을 온몸으로 사랑하겠다고 다짐했다는 것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리고 「서시」에 압축적 으로 표현되었던 윤동주의 항일정신은 일본유학 시 절에도 견결히 유지되었고 결국 일제에 의한 체포와 투옥으로 이어졌다. 1943년 7월에 도시샤대학에서 방학을 맞아 귀향을 준비하던 때, 그는 자신의 고종 사촌으로 도시샤에서 함께 공부하던 송몽규(宋夢奎) 와 함께 일제의 악명높은 특별고등경찰, 약칭 ‘특고 (特高)’에 체포되었다. 그들이 교토의 조선인학생들 을 중심으로 민족주의그룹을 조직했다는 혐의였다. 그들은 1944년 봄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교 토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아 그해 3~4월에 징역 2 년을 선고받았다.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후쿠오카형무소로 이감 되었다. 그곳에서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에, 송 몽규는 3월 7일에 원인불명의 사인으로 각각 목숨을 잃었다. 29세때의 일로, 해방을 5~6개월 앞둔 시점 이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당시 일제가 만주를 비롯해 자신이 강점한 동아시아의 여러 곳에서 자행 하던 야만적인 생체실험에 희생된 것이었다. 윤동주의 유해는 1945년 3월에 고향인 명동촌 부 근의 어느 교회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송몽규의 시신 역시 명동촌의 한 산에 묻혔다가 1990년 4월에 윤동주의 묘에서 10미터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8월 15일에 윤동주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1995년 8월 15일에 송몽규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윤동주 시인이 다닌 도쿄의 릿쿄대. 릿쿄대는 그의 80주기를 맞아 올해 10 월 교정에 기념비를 세운다(중앙일보 제공). 릿쿄대에서 지난 2월 23일 열린 저항시인 윤동주 80주기 추도 행사에 서 니시하라 렌타 릿쿄대 총장이 '내가 윤동주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윤동주는 1942년 4월부터 반년간 릿쿄대에서 공부 했고, 이후 교토 도시샤대에 편입했다(연합뉴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