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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11월30일 토요일 10 (제215호) 종합 지난 11월1일 충주박씨 참의공 종중(회 장 박경석)에서는 종원 150여명이 참석하 여참의공시제를봉행하였다.날씨가비가 오는 관계로 묘소에서 시제를 올리지 못하 고 영모재 재실에서 시제를 봉행하였으며 특히 판서공 종원들께서도 많이 참석 형제 의 돈독한 정을 나누었으며 제관분정에 판 서공하온종원에게배려한가운데이날제 향은 초헌관 창수(昌洙), 아헌관 하온(夏 溫), 종헌관 용두(容斗), 대축 종태(鍾太), 집례 경석(敬錫),좌집사 용섭(容燮).우집 사 윤철(潤喆), 진설 영관(永官) 산신제관 용호(容鎬), 산신축 환익(環益) 현종이 각 각맡았다. 시제 봉행 후에 경석 종중 장의(회장)께 서는 인사말을 통하여 오늘 우중에도 이렇 게많은종원이참석하여주셔서대단히감 사하다는 인사말과 앞으로도 많은 종원들 께서 시제에 참석하여 달라는 당부와 환절 기에 일가 분들의 건강관리에 잘 유념하여 주실것을당부하였다.이날제향이봉행된 영모재는충주박씨대표재사(齋舍)이다. 영모재 중건기를 보면 ‘六百年 유지(遺 址)가 호리지장(狐狸之場)이 되고 말았 다.’라고 전한다.이는1987년 7월에 폭우가 쏟아져 하룻밤 사이에 산사태가 일어나 재 사(齋舍)는 온데간데없고 백사장 속에 주 련8장중6장만남아종원들의중지(衆智) 를 모아 중건 계획을 세워 1993년 모든 역 사를 마무리하여 지금의 웅장한 모습으로 자태를드러내고있다. 영모재의 시원(始原)은 영모암(永慕菴) ·도동서당(道洞書堂)이다. 영모암의 정확 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나 구전으로 전해 오는 바는 관조(貫祖) 부정공 휘 영(英)의 9世휘진( 풂 ,참의공)이1366년(공민왕15) 개성에서 태어나 성균진사에 올랐으나 나 라가장차어지러워질것을알고다시금영 달의 뜻을 두지 않고 동생 소(蘇, 판서공) 와함께개성을떠나호서지방덕진현가장 동(현대전시도마동)에자리 할 제 효제충 신(孝忠悌信) 네 아들과 인의예지신(仁興 ·義興·禮興·智興·信興) 다섯 조카를 거느 리고수기치인(修己治人,자신을수양한후 에 남을 교화해야 함을 이르는 말)의 마음 으로 이거하여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후 조선초 사헌부 감찰과 진해와 직산 감무를 역임하고1422년(세종4)향년57세에영면 하여 도마동 도솔봉 밑에 신좌원(辛座原) 에 예장되니 아들들이 아버지를 흠모하는 마음으로암자를지었다. 대전광역시 유성구 문지동을 중심으로 번성한 참의공 아우 판서공(휘 소)의 제향 은 2일 오전 11시 판서공의 묘역 아래에 있 는 영사암(永思庵)에서 판서공파종중(회 장희조,총무열근)으로있었다. 대전 참의공(小參議) 종중과 광주의 찬 성공후손등60여명이참석한이날제향은 판서공과 뒤편에 설단으로 모셔진 판서공 의 아드님 인흥(仁興), 례흥(禮興), 신흥 (信興) 등 세 아드님의 제향이 각각 있어 정해진제관이정성을다했다. 영사암은 충주박씨 판서공(휘 蘇)의 분 암(墳庵)으로 증손 사암 박순 선생이 선조 를향한지극한숭조심으로묘아래에여막 을두었다. 이를세상에전하기로는 사암선생이산 수의 기이함을 사랑하여 두어 칸 집을 지 어 강학의 장소로 삼아 ‘영사’라 편 액 했다 하니, 아마도 죽을 때까지 선조를 추모하 는 뜻을 취하여 후손으로 하여금 길이 변 함없이선조를생각하도록한것이니후손 들의 간절히 흠모하는 정성이 깃든 곳이다 하겠다. 영사암은정면4칸측면2칸반으로좌우에 방이 있고 대청2칸과 툇마루가 있다.지붕은 팔작지붕으로곡선이아름답고뛰어나다. 최초건립은 사암 박순((朴淳, 1523년-15 89년) 선생이 산수의 기이함을 사랑하여 두어칸의집을지어강학의장소로삼았다 고 중수기에 전해지고 있어 450여년이 지 났을것으로추정해본다. 한편 판서공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이 중 오늘 제향을 받든 인흥(仁興), 례흥(禮 興),신흥(信興)은후사가없고차자인의흥 (義興, 참의공) 넷째인 지흥(智興, 찬성공) 으로 대전과 광주지역에 집성촌을 이룬다. 그리고 이들 후손들은 양 문중에 애경사 및 시향에함께하면서정을돈독히하고있다. 지난11월2일충주박씨강릉공파종중에 서는 30여명의 강릉공 후손들이 모여 강릉 공의시제를봉행하였다. 아침에 비가 오는 관계로 영모재 재실에 서시제를모시고비가그치자강릉공묘소 로 전원이 참석하여 참배하고 선조님의 청 백리에대한업적과예장,신도비등에대하 여후손들의입장에서더욱잘관리하고선 조님의업적이오래도록후대에까지잘전 하여질수있도록하자는토론이있었다. 박우숙 회장은 이 자리에서 선조님의 유 훈을 잘 지키어 후손의 도리를 다하고 또 우리 후손들은 서로 화합하며 종중의 백년 대계를 세워 나가자며 종원들을 독려(督 勵)했다. 강릉공 휘 효함(孝 )호는청간재(廳 澗齋)로 성품이 청렴 강직하여 처음 근위 병(近衛兵)으로 명성을 날렸고, 해풍 고을 을 관장함에 정사를 모두 으뜸으로 펼치 고,녹봉(祿俸)외에는취하지않으니청백 함이명성을떨쳤다.특히세종경술년(143 0) 가을 보령에 해구(海寇)가 침입하여 걱 정거리임에도 적임자가 없었으나 청백함 으로 선발되어 부임즉시 순찰사 최윤덕과 감사 박안신(밀양인 규정공 后)으로 더불 어 함께 성 동쪽 일리(一里)지점 당산(唐 山) 남쪽을 살펴 면밀한 계획으로 몇 달 되 지 않아 축성을 마치니 백성이 별로 힘들 이지 않고 도적이 자취를 감췄다. 얼마 되 지 않아 첨추(僉樞)가 되었고 또 얼마 후 나아가서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 使)가 되었다.아들 원직(原直)과 원창(原 昌)을 두었으며 강릉공파의 파조이기도 하다. 그리고 강릉공 묘역의 신도비가 대전광 역시비지정문화재로등록되고,대청댐둘 레길이 묘역 앞으로 지나감에 따라 길손을 잡는다. 묘는 특사예장(特賜禮葬)으로 비 문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 년간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문풍을일으키는데크게기여했던서 거정(徐居正, 1420∼1488)이 지었다. 비의 전면대자는‘有名朝鮮嘉善大夫行江陵都 護府使 贈 吏曹參判 忠州朴公孝 道碑銘 幷字’라고 새겨져 있다.크기는높이 164㎝, 폭64㎝,두께35㎝이다. 수양대군이어린조카단종으로부터왕위 를 찬탈 한 것에 격분하여 살 곳을 찾아 남으 로 내려와 현 광주 봉황산(鳳凰山) 아래 집을 짓고순수함을보전하며깨끗이살아온찬성 공(휘지흥)의제향은지난15일묘소에서찬 성공파 종중(회장 창규)주관으로 봉행되었 다. 이날 제향은 창규 회장의 집례로 하온 남 성동종중 회장, 아헌관 종우 하촌공종중 회 장,종헌관창근판서공이사(대전)가각각잔 을올리고수철현종이독축하였다. 찬성공 휘 지흥(智興,1411~1489)은 1411 년 고려조에 성균 진사로 감찰과 좌랑 의 천,은산군사를역임한휘소(蘇)와고령오 씨 사이의 오형제중 넷째아들로 충청도 회 덕에서태어났다. 수양대군의 횡포에 격분하여 호남 땅 깊 숙한 곳에 은거하였으나 학문이 뛰어남을 알고 있는 권람이 수차례에 걸쳐 세조에게 천거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곧은 선비의 삶을살았다. 찬성공이 충청도 회덕에서 전라도 광주 로 이거하는 과정에 득남하는 과정의 일화 가전해진다. 세조를피해은거할곳을찾아남으로향 하던 중 전남 장성 입암산 갈재에 이르러 날이 어두워지자 산막에 들어 하룻밤을 묵 게 되었는데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내가 너의 살 곳을 일러줄 터이니 지금 밖에 있 는 나의 쌍마를 타고 가다가 그 쌍마가 멈 추는 곳이 너의 살 곳이니라. 그 곳에 쌍마 중 한 마리를 매어 표를 해두고 오너라.”하 였다. 그 쌍마 멈춘 곳이 방마산이 백마산 으로바뀌었다고한다. 찬성공이정착한뒤2년만에본부인하동 정씨가죽고이천서씨처녀와재혼하여8년 만에 하촌공(荷村公) 정(禎)을 낳고, 찬성 공의나이63세가되던어느날부인서씨와 함께 고향을 찾아 장성 입암산 갈재를 넘다 산 아래 산막에서 또 하루를 지내게 되었다. 이날밤부인서씨의꿈에입암산위에서 큰 바위가 굴러와 서씨의 치마폭에 들어오 는 태몽을 꾸었다. 이듬해 1475년 5월 18일 둘째아들이 태어났다.찬성공이 이 아이의 이름을 태몽에 따라 아명을 입암으로 하다 뒤에 상(祥,시호 문간공)이라했다.2년후 셋째아들육봉공(六峯公)우(佑)를낳았다. 이들 삼형제가 문장으로 세상을 울려 이들 을 가리켜 당시 송나라에는 부자삼소(父子 三蘇)가 있고 동국(東國)에는 형제삼박(兄 弟三朴)이있다고하였다. 절의의 표상으로 문장이 뛰어났던 문간 공 휘 상(祥) 선생의 제향은 절골 소재 묘 역에서 문간공종친회(회장 종석) 주관으 로봉행되었다.종석회장이초헌관으로헌 작한 이날 제향에는 승천, 종표 현종이 아 헌과 종헌을, 축관 수철, 집례 영성 현종이 각각맡아봉행하고문간공의장자휘민제 (敏濟),장손인수(仁壽),그리고실전된인 수 공의아들 諱진(璡)이하9세 11위의단 소에서각각제향이이어졌다. 눌재박상선생은조선성종때(성종5년, 1474)에찬성공(휘지흥)의둘째아들로태 어나 연산 임금 때에 문과에 급제했다. 강 직한 성품으로 인해 왕을 비롯, 종친, 훈척 들에 대한 과감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음으 로서 관직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곧 연산임금때총애를받는궁인의부친으로 서 향리인 나주에서 권세와 탐학을 자행하 던우부리(牛夫里)를처단해버린일,중종 초기 언관인 사간원의 헌납(獻納)직에 있 을때공신호를남수(濫收,거두어들임)하 는 것, 외척들을 중용(重用)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였던 일, 중종 10년(1515)에는 담양 부사로 재직하던 중 반정으로 말미암아 폐 위 조처를 당한 중종의 첫 왕비 단경왕후 신 씨(端敬王后 愼氏)를 복위시키고 왕비의 폐위를 주도한 박원종 등 반정의 3훈신(勳 臣)을임금을협박한죄로처벌해야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일 등으로 여러 차례 옥 에갇혔다가풀려나기도하고,먼곳으로유 배당하기도 하였으며, 상주·충주 목사(牧 使)등주로외직으로전전하였던것이다. 그렇지만이같은불의에대한과감한지 적과 비판은 이 시기 정신적 지표가 되어 이후 의리사상을 선도한 인물로서 높은 평 가를 받게 되었다. 당시 사림의 영수 조광 조(趙光祖)는 “그의 ‘신씨복위상소’는 강 상(綱常)을 바로잡은 충언이었다.”고 극구 칭찬한바있다. 눌재는 또 역사적으로 「동국사략(東國 史略)」을 저술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고려 시대까지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특히 절의 의사적을널리들어내고자하는의도로편 찬한것으로이해되고있다. 그런가 하면 눌재는 외직으로 담양부사, 충주목사로 재임하던 때에 두 차례에 걸쳐 청백리로 뽑히기도 하였고, 일찍 별세한 형 님박정(朴禎)을대신하여가사를돌보며아 우인 육봉(六峯)박우(朴祐)가 진사시에 합 격하자 형님과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없음을 슬퍼하면서재산을나누어주어형제간에지 극한우애심을드러내보이기도하였다. 눌재 선생의 첫 번째 부인은 증 정부인 진양유씨이고두번째부인은증정부인하 동정씨이다. 슬하에 민제(敏齊), 민중(敏 中), 민고(敏古) 삼형제를 두었는데, 차남 민중(敏中)은 후사가 없어 백형 민제(敏 齊)의 차남 희수(希壽)로 하여금 후사를 이었으나 장자의 민제(敏齊)의 아들 인수 (仁壽) 공 또한 후사가 없어 희수(希壽)의 아들 진(璡)을 입적시켰다. 문간공의 손자 희수(希壽)는 임진왜란에 호남지역 의병 장 고경명 장군과 회재 박광옥 선생 등과 함께의병을일으켜많은공적을세워호남 의병사에자주거론되기도한다. 한편 문간공 종중은 박종석 회장과 용희 총무 체재로 투명한 운영을 목표로 하고 있 다. 그리고 원로분과 소통의 자리를 만들고 임대료등을현실화하고지출을최소화하여 적지않은종재를확보하면서종원들의신망 또한 두터워 여타 문중의 모범이 되고 있으 며,지난봄묘역에잔디를식재하고주변 잡 목을제거하면서묘역또한산뜻해졌다. /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l. net) 충주박씨 가을 시향 봉행븣돈파사·참의공·판서공·강릉공·찬성공·눌재·사암선생등 대전에큰집성촌을두며토성으로번성하였고,이후호남지방의광주와장수등으로이거하며절의정신과학풍을 불러일으키며크게번성한충주박씨종중의가을시향이 지난1일대전영모재의돈파사와참의공을시작으로2일영사암의판서공,강릉공3일포천의사암박순선생묘제 ,15일광주절골의찬성공과16일 눌재 선생 묘재 순으로 각각봉행되어소개해본다. 충주박씨는고려부정을역임한휘영(英)을관조(貫祖)로세계를이어오고,이후개성소윤을역임하고사복시정에 증직된8세(世)휘광리(光理)의 두 아들 진( 풂 ),소(蘇) 에이르러참의공파(參議公派)와판서공파(判書公派)로각각분파되어세계를이루고있다. 관조휘영의아들신(臣)이고려때검교신호위대장군을지냈으며,손자원숭(元崇)은삼사우사를역임하고첨의 평리를지낸아들득승(得升)과함께가세를일으켰다.고 려말에와서는권신임견미의횡포를탄핵했던팔세손광리(光理)가개성소윤을역임,사복시정에증직되었고세 아들을두었는데장남휘윤수(允守)는서적점록사(書籍 店錄事)를역임하였으나후사가없었고,사헌부감찰을거쳐진해직산감무를지냈던차남진( 풂 )과은산군사를역 임한셋째소(蘇)형제가어지러움을피하여충청도덕진 현가장골(현대전광역시서구도마동)로은거하여살게되어이로서충주박씨의세거지를이루게되었고,관조이 하팔세의묘소는개성동문밖에모셨는데불행이확인할 수없어대전도마동의추원사에위패를모시고있다. 영모재전경①추원사②영모재③돈후문④참의공묘소⑤전사실⑥참의공유허비등⑦참의공의장 남강릉공신도비 참의공 휘 진( 풂 ) 영모재제향광경 영사암과판서공묘역전경,대전광역시유성구문지동466번지 판서공과세아드님제향에참여한제관과종원들이함께하고있다.(사진앞줄제복입은제관평근븡웅 수븡희영븡선의븡금철븡호근븡희경순) 강릉공묘,대전대덕구삼정동산6-2 강릉공향사에참여한제관이함께하고있다. 문간공박상선생의묘제봉행후참례한종원들이함께하고있다.이날제향에는대전의참의공(휘의흥)후손들이대거참례하면서 돈종(敦宗)을과시했다. 판서공 휘 소(蘇) 박창규 박하온 박종우 박창근 문간공종중의종석회장이초헌관으로헌작하고 있다. 강릉공휘효함(孝 ) 찬성공 휘 지흥 문간공 휘 상(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