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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24년 6월 Column  명사 칼럼 작은 소리 큰 울림 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 대통령은 독도 영유권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취한 미국에 대해, 그리고 미국의 애매한 태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 석하고 영유권을 주장한 일본에 대해 과감히 맞섰다.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확실하 게 천명하고 독도에 접근하는 일본 선박들을 나포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일본이 조선을 ‘통 치’하는 동안 소유했거나 투자한 재산에 대해 돌려줄 것을 요구한 일본에 대해서도 단호하 게 맞섰다. 그 상징적 사례가 1953년의 한일회 담 때 일본측 수석대표였던 구보타 간이치로 [久保田貫一郞]가 망언을 하자 그 자리에서 깨 버린 일이다. 양유찬 한국측 수석대표는 회담 을 진전시키려는 선의에서 “레츠 베리 더 해치 트(Let’s bury the hatchet)”라는 인사로 시작 했다. 직역하면 “도끼를 묻어버립시다.”로, ‘지 난 날의 잘못을 잊고 화해하자’라는 뜻이다. 이 인사말에 구보타는 “도끼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라고 오 만한 자세로 비웃는 듯 대꾸했 다. 일본은 조선에 대해 잘못 한 것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 에 양유찬 수석대표와 일행은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1960년 ‘4월혁명’으로 이승 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제2공 화국이 수립되자 미국은 장면 정부에게 일본과 관계를 ‘정상 화’하도록 요구했다. 장면 총리가 ‘친일적’이지 는 않았으나, 한 차례도 일제에 대해 저항한 일 이 없었고, 장 총리의 각료들이나 고위공무원 들이 대체로 일제 때 관직을 가졌기 때문에 이 승만 정부에 비해 반일의 정도가 훨씬 약하다 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권고 또는 요 구에 응해, 장면 정부는 일본의 외상 고사카 젠 타로(小坂善太郎)의 방한을 받아들였다. 고사 카는 1960년 9월 6일에 정일형 외무장관과 회 담했다. 이것은 일본 고위관리의 최초의 방한 이었고 최초의 한일외무장관 회담이었다. 그러 나 한일수교의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데다가 한일수교를 받아들일 국내 분위기가 성숙하지 않아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박정희 정권, 한일 수교 서둘러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을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이제 한국이 이승만 대통령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미국을 방문하기 전인 1961년 11월 일본에 들러 이케 다 수상과 만나 회담하고 있다(연합뉴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