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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6월30일 목요일 10 (제186호) 종합 2008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연재해온 운산박희학 참봉의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철학』율정 박서생 선생을 비롯한 朴姓의청백리를 소개한 『청백리 열전』21세기를살아가는우리들에게교훈이되는주옥같은글『한빛의메아리』를엮어‘그리움을남 긴박근혜대통령과한빛의메라리’를지난2월 말출간하바있어성손여러분가정에소장을권장드립니다. 정가15,000원구입문의053-588-7300한빛신문 운산박희학참봉저서‘그리움을남긴박근혜대통령과한빛의메아리’구입안내 박근혜대통령과아버지인박정희대통령의국정철학은우리나라를위해아무도하지못한많은일 을함으로써경제대국으로발전시켰다고생각하 는데어떤죄로탄핵을받았는지알수가없었다......저자인사말에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선생이 숙종(肅 宗) 15년(1689년)에 정읍에서 사약(賜藥)으로 사사(賜死) 한후 숙종(肅宗) 19년(1693년)에 고암서원(考巖書院)을 창건하여 175년간 향사 (享祀)하여 오던중 고종(高宗) 5년(1868년)에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 로 당초의 사우(祠宇) 및 서원(書院)이 철폐되 었다. 철폐된지 85년후인 1953년에 유림(儒林)들의 발의추진(發議推進)으로 성균관(成均館)과 호 남(湖南)의 향교(鄕校)들의 결집(結集)하여 서 원(書院)을 창건하고 우암(尤菴) 송시열(宋時 烈)선생을 주벽(主壁)으로 위패(位牌)와 영정 (影幀)을, 두남(斗南) 박세경(朴世經)선생을 배향(配享)으로 위패(位牌)를 봉안하여 노양서 원(魯陽書院)이라 하고 매년 음력(陰曆)3월1일 에 향사(享祀) 하여오다가 2002년에 유림(儒 林)들의 발의로 성균관(成均館)을 비롯하여 호 남사대향교(湖南四大鄕校)와 全羅北道 24개 향 교(鄕校)의 협의로 현암공(玄巖公) 박 재(朴 載)선생을 추배향(推配享)으로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여향사(享祀)하고있다, 노양서원은 사우(祠宇, 玄巖祠) 내삼문(內三門, 景仰門) 외삼문(外三門) 강당(講堂) 관리사(管理 舍) 화장실(化粧室)등으로강당은전면3칸측면3 칸으로산앙재(山仰齋)편액과노양서원편액이있 어강학을펴는한편제숙소로도활용하고있다.대 지총면적:6.678㎡(2.020평)총연건평:547㎡(180.5 평)으로 경내에는 노양서원 중건묘정비, 두남선생 유허비가있으며관리주체는밀성박씨행산공후현 암문중으로현정읍시종친회장을맡고있는박광희 회장의땀과열정이배어있기도한다. ▲우암송시열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송성뢰(宋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 (尤齋). 봉사(奉事) 송구수(宋龜壽)의 증손으 로,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송응기(宋應期)이 고,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송갑조 (宋甲祚)이다. 어머니는 선산곽씨(善山郭氏)로 봉사곽자방(郭自防)의딸이다.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 나 26세 (1632) 때까 지 그곳 에서 살 았다 . 그러 나 뒤 에 회덕(懷德)의 송촌(宋村)·비래동(飛來洞)·소 제(蘇堤)등지로 옮겨가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 인으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 (宋浚吉)의 집에 서 함께 공부 하게 되 어, 훗 날 양 송(兩宋)으로불리는특별한교분을맺게되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 ·『기묘록(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 이이(李珥)·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받았다. 1625년 (인 조 3) 도사 이덕 사(李德泗)의 딸 한산 이씨(韓山李氏)와 혼인하였다. 이 무렵부터 연산 (連山)의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성리학과 예학 을 배 웠고 , 1631년 김장 생이 죽 은 뒤 에는 김 장생 의아들김집(金集)문하에서학업을마쳤다.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 (一陰一陽之謂道)」를논술하여장원으로합격하였 다.이때부터학문적명성이널리알려졌고2년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후일의 효종)의 사 부(師傅)로임명되었다.약1년간의사부생활은효 종과깊은유대를맺는계기가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 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낙향하여10여년간일체의벼슬을사양 하고전야에묻혀학문에만몰두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 을 대거 기용하면서,송시열에게도 세자시강원진 선(世子侍講院進善)·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관직을내리자비로소벼슬에나아갔다. 이 때 송시열이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 는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존주대의(尊周大義:춘추대의에 의 거하여 中華를 명나라로 夷賊을 청나라로 구별 하여 밝힘)와 복수설치(復讐雪恥: 청나라에 당 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를 역설한 것이 효 종의북벌의지와부합하여장차북벌계획의핵 심인물로발탁되는계기가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 2월 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송시열 을 포 함 한 산 당 (山 黨 ) 일 파 가 모 두 조 정 에 서 물 러났다. 그 뒤 1653년(효종 4)에 충주목사, 1654 년에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사양하고취임하지않았다. 1655년(효종 6)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몇 년간 향리(鄕里)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7년 상 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 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정유봉사(丁 酉封事)」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 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 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 벌계획의중심인물로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 (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 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 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12월벼슬을버리고낙향하였다. 이후 현종 15년 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 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거의 관직을 단념하였다. 다만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 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 종재야에머물러있었다.그러나재야에은거하 여 있 는 동 안 에 도 선 왕 의 위 광 과 사 림 의 중 망 때 문에막대한정치적영향력을행사할수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송시열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 의 대신 들은 매 사를 송 시열 에게 물 어 결정 하는 형 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송시열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 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1675년 (숙 종 1) 정월 덕 원(德源)으 로 유배 되었 다 가 뒤에 장 기(長 덴)·거제등지로이배되었다. 유배 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 처벌 주장이 일 어나,한때생명에위협을받기도하였다.1680년경 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그 해 10월 영중추 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 되었고,또봉조하(奉朝賀)의영예를받았다. 1682년(숙종 8)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훈척들이역모를조작하여남인들을일망타진하 고자 한 임술삼고변(壬戌三告變)사건에서 김장생 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 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제자 윤증(尹拯)과의 불화로1683년노소분당이일어나게되었다.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세자예정자)의호칭을부여하는문제로 기사환국이일어나서인이축출되고남인이재집권 했는데,이때세자책봉에반대하는소를올렸다가 제주도로유배되었다.그러다가그해6월서울로압 송되어오던중정읍에서사약을받고죽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송시열의 억울한 죽음이 무 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 다.이 해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송시열을 제향 하는서원이세워졌고,다음해시장(諡狀)없이 문정(文正)이라는시호가내려졌다. 이 때부터 덕원·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 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 개소에 이르게되었는데,그중사액서원만37개소였다.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간에 칭송과 비방이 무 성했으나,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과 174 4년(영조 20)의 문묘배향으로 학문적 권위와 정 치적정당성이공인되었다.영조및정조대에노 론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송시열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다 음백과사전에서옮김) ▲현암박재선생 현암(玄巖) 박 재(朴載)선생은 밀성대군(密城 大君) 24세 행산공(杏山公) 11세로 자(字),이후 (以厚) 호(號),현암(玄巖)이며 선조(宣祖) 38년 (1605년 )에 고 부 금정 촌 (古阜 金井村)<현 재 정 읍시 용계동 정문마을>에서 부휘(父諱) 정민(廷 珉)의자(子)로출생(出生)타고난효자이다. 공이 뜻을 가다듬고 배움을 돈독히 하여 연원 문헌(淵源 文獻)의 전통을 얻고 가학인 유학을 숭봉(伊洛之學·儒敎)하고 날마다 소학 효경 대 학등글을외우며정심성의의지경에힘을쏟아 조년에 이미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지식을 확 고히 하였다.(格物致知) 7세에 처음 입학함에 정성온정(精誠溫情)의 도(道)로써 가르치시고 옛날 증자의 양지와 육적의 회귤과 맹종의 설순 고사를 들어 말씀하셨더니 이로부터 부모의 말 씀하신바를한번도어김이없었으며매번대추 밤 감 배 등을 얻으면 반드시 품고 와서 부모에 게 드렸다. 그 다음해 초봄에 부친께서 홀연히 괴질을 얻어 구미(口味, 입맛)를 잃고 여러 날 식사를 못하였는데 공이 외출하여 놀다가 울밑 에 새 쑥과 이른 냉이를 보고 캐서 모친에게 드 렸더니 모친께서는 심히 기특하게 여겨 채갱을 끓어올리니부친은과연구미를얻어병이바로 나았다.14~5세에문장이크게진취되어18세때 향시에서 장원하였으나 공은 공명 차타(蹉 , 시기를 잃음)되어 다시는 과업에 뜻을 두지 않 고이에탁의한재조와정찰한지식으로道를실 지에구하며경전에더욱더매진하였다. 집에서독서할때의문난곳이있으면곧손으로 기록하고 날을 쫓아 기록하여 일찍 그 아들 두남공 을 노선생(우암)에게 보내어 문후하고 질문하였으 며 또 일찍 관혼상제의 례를 물었더니 선생께서 대 답하시기를 종이에 가득한 물음이 모두 옅은 생각 으론감히추측할바가아니라하시고또공께서병 들고혼미황폐하여천성을회복하지못할까근심된 다하였더니선생께서대답하시기를간절히바라노 니 더욱 정련(精鍊)을 더하여 깊이 나아가면 기필 코천성을회복할것이니다행한일이라이르셨다. 공이계시는마을에한반석이있었는데일찍이 자제문도들과 더불어 그 바위 위에서 하락괘주 (河洛卦疇)의 이치를 강론하였더니 세상이 현암 (玄巖)선생이라 칭하고 혹은 현암(賢巖) 은사라 칭하 니 그 이른 바 현암 (玄巖)은 아마 현 묘한 이 치 를 암상 에서 강 론한 데서 취 함일 것이 고 또 이른 바 현암 (賢巖)은 혹 현 인이 居한바 바 위라 는 뜻에 서 취한 것이 아닌가 한다. 노 선생께서 현암 2자를 써 주셔 서 인 하여 호 를 삼고 더 욱 정진 과 연 마를 더하여청성회복을기할것을의미하는의가정련 기복천성(益加精鍊期復天性)을써보냈다. 공(公)의 말씀은 올바르고 희롱하거나 웃으 시지 않으시며 그의 거처는 항상 공경하고 거만 하지 않으며 일찍이 기를 높여 스스로 치욕을 당 한일 이 없으 며 또 한 일찍 이 술을 마 셔 생각 을 거 칠게하며업을폐한일이없었다.또큰글자로폐 호독 서(閉戶讀書, 문을 닫고 글 을 읽음 즉 조용 한 환경과분위기를뜻함) 창외풍설(窓外風雪,창밖 엔 바람과 눈이 휘모라쳐도 관계하지 말라는 뜻) 권중성현(卷中聖賢,책에는 성현의 말씀이 많으므로 성현을 대한 듯한 마음으로 修學하느 는 뜻) 등을 써주시어 권면하시다. 성품이 본디 지효하여색양의도(色養之道,얼굴빛을和하게 하여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림)를 다하여 예와 공 경으로써하며멀리놀지않으며멀리떠나지않 되떠나면반드시오래하지 않으며출고반면(出 告反面, 외출할때는 반드시 사유를 고하고 귀가 하면 반드시 결과를 보고드리는 것)의 도를 성 인의 가르침과 같이하며 혼정신성의 예를 다했 다. 경오년에 부친상을 정유년에 모신상을 당하 여 상례의 도를 지켰으며, 이미 양례를 마치고 성묘 길에는 풍설한서를 피하지 않고 아무리 척 설이 쌓일 때라도 항상 조그만 비를 묘 곁에 두 었다가 항상 왕서 묘위에 눈을 다 쓸고 배곡하 니 산 아래 마을사람들이 그 성효에 감동되어 공보다먼저와서묘위눈을치우기도하였다. 이같이 선생은 타고난 효자이면서 우암선생 과 교유하면서 학문 또한 뛰어나 따르는 사람이 많았으며 현암 마을이 학문의 전당으로 인식되 어 훗날 그 학문은 영주정사를 통해 더욱 빛이 났다. 슬하에 세유(世維) 세경(世經) 세위(世 緯 )등 세 아 들 을 두 었 으 며 이 중 차 자 (次 子 ) 인 세경(世經)을 송우암(宋尤巖)선생 문하생(門 下生)으로 입문시킴으로서 부자(父子)가 일사 일문동출(一師一門同出)하게 되었다. ▲두남박세경선생 박세경(朴世經)선생은 현암공(玄巖公)의 차 자(次子)로서 자(字) 제이(齊而) 호(號)는 두 남(斗南)이며 인조(仁祖) 4年(1626년)에 고부 (古阜)금정촌(金井村)에서 태어났으며 조선 (朝鮮)중기(中期)대학자(大學者)이시다, 기질이 중후하고 정신이 낭철하여 7세에 천자문 을읽을때효도효자의뜻을묻고조금자라매이미 사친의례를 알아서 밤에는 부모의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이른 아침에는 부모의 밤새 안부를 묻는 등 혼정성신(昏定晨省)의 예를 따랐다. 색온기화(色 溫氣和부모앞에서얼굴빛을따스하게하며기운을 화하게하는것)하며과거장에나아가지않고스승 을 쫓아 일찍이 원유(遠遊)하지 않으며 숙수(菽水, 콩과 물이라는 뜻으로,변변치 못하고 검소한 음식 을이르는말)의노력으로몸소그노고를집행하며 전후 상에 슬프고 헐어서 거의 멸성에 이르렀으며 장사와제사에예절에어긋남이없었다. 형 세유와 더불어 우애가돈독하였고,아우 세 휘는 일찍 죽으매 그 고자를 자기아들처럼 부양 하였다. 공은 무예가 일찍이 성취되어 나이 12세에 활솜 씨와 말타는 재주로 사람을 놀라게 하였고, 26세에 향시에서는장원하였으나성시(省試,과거)에서실 패함에사람들이애석하게여기지않은이없었건만 공은 태연하여 가로대 심장적구가 비록 과거에는 다행하겠으나이는다만일시적으로부모를기쁘게 할 뿐이요 후세에 영명을 남기는 바는 아니다 하시 고다시는뜻을흔들리지않고오로지몸을위한실 학에 힘써 드디어 스승의 문에 나아가 행실과 지식 을 높이 묻고 근고하며 게을리 하지 않서 어려번 스 승의문에서칭상한바되었다. 가로대 수백리를 도보로 왕래하면 선을 즐기 고 의를 좋아함이 더불어 비교할 사람이 적으며 생각에 잠기고 행실에 힘써 자못 사랑스럽다 하 시고 또 일찍 안빈수계 등 글자를 써서 힘쓰게 하시고 이(理)를 얻으면 대현의 문에서 이미 사 람의미치기어려운바이오그공경공자를논하 는 공부와 심성 정음 등 여러 작품이 넉넉히 그 공정과조예의대략을생각할수있었다. /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서원탐방.... 정읍노양서원(노양서원) 전라북도 정읍시 흑암동(현암)215-1 번지(상흑길44) 노양 서원 은 우암 송 시열 선생 을 주벽 으로 하 고 현암 박 재 선생 과 그의 아 들 두남 박 세경 선 생 을좌우에봉안하여음력3월1일고부향교유림주관으로성현의학덕을기리고있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선생은 1689년 기사환국 때 숙의장씨가 낳은 아들(경종)의 세 자책봉이 시기상조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로 유배되었고,국문을 받기 위해 한양으로 압송되는길에정읍에서사약을받고숨졌다. 정읍은우암과교유하며학문을토론했던현암박재선생과아들두남박세경선생의세거지 이다.두남 박세경은 우암선생의 제자로 유배지까지 찾아다니며 스승의 예를 다하였기에 우 암 선생 사후 4년 후 인 1693년 정읍 에 서 원을 세 우고 선생 의 높은 학덕 을 기린 것은 아마 다도 인지상정(人之常情)이었을것으로보인다.이에노양서원과배향된인물을소개해본다. 노양서원전경①사우현암사②내삼문(경앙문)③두남선생유허비④강당⑤외삼문⑥화장실 사당현암사(玄巖祠) 강당 서원의창건 서원의규모와시설물 배향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