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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11월30일 월요일 10 (제167호) 종합 농아당박홍장선생의부조묘정충사복원과재실준공식이지난18일경북영덕군축산면칠성리소재종택에서있었다.(사진은편 액제막식후 가진기념) 1960년 12월 화재로 소실된 농아당 (聾啞堂) 박홍장(朴弘長)선생의 묘 우(廟宇) 정충사(精忠祠)가 60년 만 에 복원되어 지난 18일 오전11시 위 패환안(還安)고유제를올렸다. 이날 고유제는 ‘코로나19’로 인해 행사를 대폭 축소하였으나 소식을 듣 고 선생의 충절과 애민정신을 기리려 는 지역민들이 찾아와 입구에서부터 체온 체크와 마스크를 나누어 주며 ‘사회적거리두기’를 실천한 가운데 효락(孝洛,수서공后)집례관의창홀 에 따라 서락(瑞洛, 적명 신일) 13대 주손이 위패를 봉안 후 분향과 강신 에 이어 초헌관으로 헌작한 가운데 종화(鍾華) 축관의 독축은 낭랑이 울 려 퍼져 선생의 가르침을 계승하는 듯했다. 초헌례에 이어 무안박씨 영해파 종 손 원길(元吉), 무의공 종손 연길(淵 大) 현종의 아헌과 종헌으로 30여분 에걸쳐엄숙봉행되었다. 정충사(精忠祠)는 농아당공(휘 홍 장) 사후 영해부의 사림(士林)이 선 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영덕군 영 해면 원구리 서편 구봉산 아래에 사 당을 건립하여 제향을 모신 것이 시 원이다. 1666년(현종7) 구봉정사(九 峯精舍)로 이름이 바뀌면서 형 무의 공 (휘 의 장 )과 함 께 향 사 되 어 추 앙 받 았다. 이후 무의공이 시호를 받은 이 듬해인 1785년(정조9)구봉정사는 서 원으로 승격 되었으나 대원군의 철폐 령에 의해 훼철되어 후손들은 농아당 종택(경북문화재자료 제320호)으로 묘우를이건하여향화를받들었다.그 러나 1960년 12월 화재로 수많은 장 서(藏書)와 유물이 함께 소실되어 후 손들은 죄스런 마음 감출 수 없었다. 이에 13대 주손 서락(신일) 신우종합 건설 회장이 거액을 부담하고 문중의 정락 회장을 비롯 제종인(諸宗人)들 의 협조로 불천위 묘우인 정충사와 재실이중건되었다. 농아당 박홍장(朴弘長) 선생은 증 병판공(贈兵判公) 휘 세렴(世廉)의 둘째 아들로 영해 원구리에서 1558년 태어났다. 1580년 선조13년 별시무과 에 급제하여 군자감정, 장악원정을 거쳐 1596년(선조29) 대구부사로 재 임 중 통신사 부사로 일본에가 나라 를 위해 부여된 소임을 다하고 임지 에서 터득한 유익한 정보를 국왕에게 보고하는 등 정유재란 발발에 대비하 도록 하였다. 귀국 후 순천부사에 제 수되었으나 대구지역 백성들의 간청 에의하여대구부사에부임되었다.그 러나 공께서는 노심초사로 병이 깊어 벼슬을 사양하고 돌아왔으나 다시 상 주목사 겸 첨병마절제사에 제수되었 다.그러나통신사로다녀온후유증과 임 란 중 부 민 들 의 아 픔 을 달 래 주 지 못하는 심병을 털어내지 못해 부임치 못하고 1598년 서거하였다.투철한국 가관과 애민정신으로 백성을 다스린 전도유망한 41세의 젊은 나이기에 국 가적인큰손실이아닐수없었다. 한편 이날 고유제후에는 농아당 재 실 편액 제막식을 갖고 준비된 오찬 과 함께 정충사 복원의 기쁨과 13대 종부 예초 정정순 여사의 시집 ‘인생 의 탑(도서출판 예초)’, 정해은 편저 ‘임진란기 농아당 박홍장의 구국활동 연구’ 발간을 축하하며 농아당 선생 의유지를기렸다. 농아당(聾啞堂)박홍장(朴弘長)선생묘우복원븡종택재실준공 화재로소실60년만븣통신부사로동사일기남기는등큰활약 농아당공의 13대 주손 서락(적명 신일) 현종 이고유제에서헌작하고있다. 충남논산시연무읍고내곡리의성모재앞마당에전국유명 시조시인의아름다운선율의시5수를새긴시비가세워졌다. 지난 4월에 건립을 끝내고 관심을 가진 문인들과 사회 의 저명한 인사들을 한 자리에 모시고 성모재 시비 제막하 려 했으나 코로나의 위세가 시들지 않고 기세를 더하여 온 나라 방방곡곡을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넣고 있어 부득이 연기에 연기를 하여 오다 지난 달 28일 방역지침에 따라 소수의인사를초청한가운데제막식을가졌다. 시비 제막은 △문학을 통한 지역문화의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 △산골에 산재한 한국문학 예술의 소재를 연결하 는 기회 부여 △ 시비 제막을 통한 지역문화 유산의 존재 가치를 부각하게 시킴 △ 문인들과 지역주민의 소통을 통 한 문학에 대한 이해와 홍보의 효과를 기대한다며 성모재 주인황곡박영록시인은전한다. 특히 조그만 시골마을에 시비가 세워져 이를 지켜본 많 은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메말라있고 도시와 달리 문화적 소통의 공간이 떨어져 있는 때에 시비 건립은 주민들의 정 서함양과 시에 아름다움을 몸소 느낄 수 있는 문학의 공간 으로거듭태어날것이라며반기고있다. 이날 세워진 시비는 △김광수 시조 시인의 작품 「축 성모 재 중건」△ 원용우 시조 시인의 작품 「성모재의 아름다움」 △박상문시조시인의작품「꽃동산성모재」△김석철시조 시인의 작품 「성모재를 기리며」△박영록 시조 시인의 작품 「대보름달」의5인시조를5각형의오석에새겨졌다. 시비의전체모습은천원지방(天圓地方)을이미지(ima ge)로 자연의 원리에 천지인(天地人)의 요소를 나타낼 수 있도록 도안했다. 우주 만물이 하나로부터 천체에 이르기 까지 일정한 자연의 원리에 따라 위에서부터 조감(鳥瞰) 하면 하늘에는 태양,달,별을 상징하는 둥근 ○을 놓고,그 아래에 ☆모양의 오각형의 시비를 얹어놓아 팔각의 비신 (碑身) 이 떠받쳐주고, 그 밑에 팔각( )의 기단석 (基壇石) 아래에 지구를 상징하는 땅은 네모(□)의 콘크 리트로 거푸집을 만들어 제작하였는데,한 면에 한 사람의 시를새겨5인이각각아름다운비율로만들어졌다. 이날 제막식은 논산문화원 이준창 사무국장의 사회로 취지와 작품명, 내빈·작가소개, 경과보고, 내빈축사, 축시 낭송,답시순으로진행되었다. 한편 이날 제막식에는 권선옥 논산시 문화원 원장,정현 수 전 강경역사문화 연구원장,이진영 놀 뫼 신 문 기 자 , 이 순영 논산문인협회 감사, 고석근시인등이참석자리를빛 내고,황곡 박영록 선생은 축시에 대한 답시로 『아늑한 고내 곡의 아름다운 모습과/ 아담한 성모재가 옛 전통 보듬고서/ 문인들 시조 가락이 은은하게 퍼지네./ 마을을 찾아오는 귀 한 손님 맞아들여/ 넌지시 수작을 거는 성모재 시비여라/ 문향이 물씬 풍기는 오늘의 염원이여/ 고향을 떠났다가 찾아온 동무들도/ 기억을 더듬어서 캐어낸 추억처럼/ 성 태봉자락에안겨오래도록빛나리.』라며화답했다. 뱛 성모재시비 제막식가져 전통문화 계승 문학을 통한 지역문화의 수준 높이고 깊은산골에우리문화예술의발전초석깔아 충남논산연무읍성모재시비제막식이지난달28일개최된가운데참석한문인들이시에새겨진시를보며감상에젖고있다. 제막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왼쪽 성모재 주 인 황곡 박영 록 시조시인 밀양박씨 해백공파의 파조 해백공 박소영 선생의 세일제가 지난 15일 (음10.1) 경기도 고양시 두응촌 묘역 에서봉행되었다.강직한성품으로어 떠한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은 강직한 성품으로 일세의 사표가 된 해백공은 공효공(휘 중손)의 손자로 1 465년(세조11)에 태어나 1483년 생원 시에 합격하고 1485년(성종16) 별시에 서 3등으로 급제하였다.1497년 사헌부 지평,1501년홍문관응교,1503년(연산 9) 사헌부 장령, 1504년 홍문관 직제학 겸 지제 교 벼 슬에 있을 때 연 산의 생모 윤 씨의 추승 하는 일 에 반 대하 여 60대 의 태형을 맞고 피투성이가 된 채 함거 에 실려 충청도 진천으로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귀양에서 풀려나1509년 형조참의, 1513년 홍문관 부제학을 거 쳐 황해도 감사가 되었다가 호조참의 가 되어 왜놈들에게 살해당한 백성을 위한 계책을 함께 논의하는 등 시종 애 민정신으로 일관했다. 1518년(중종13) 10월 영흥부사 재임시 임지에서 순직 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두응촌 선영아래 부인인 정부인 해주오씨와 함께(함폄) 모셨으며, 재사 백당(栢 堂)은 경기도 고양시 주교동 551-9번 지에소재하고있다. 해백공의 삶은 일시의 안일을 위해 몸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정의를 위 한 삶으로 일관하였음을 알 수 있어 성율 회장은 이날 음복시간에 인사말 을 통해 어려운 여건에서도 참례해 준 종원 여러분에게 감사드린 다고 말 하고 종친회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 선조의 삶을 욕보이지 않도록 어떠한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정도를 걸어나갈것을천명했다. 한편 이날 제향의 제관은 다음과 같 다. 초헌관 종현(부사공 后, 청주 장 양), 아헌관 기호(군수공 后, 군포 금 정), 종헌관 상길(창강공 后, 예산 수 철), 집례 상성(도사공 后, 예산 광시), 대축은순(도사공后,청양 운곡),좌집 사인길(군수공后,군포금정),우집사 경신(현령공后,예산신양)-이상- 연산의 폭정에도 굴하지 않은 강직한 성품을 지닌 해백공 박소영 선생 세일제 봉행 밀양박씨 해백공파중앙종친회 경기도 두응촌 선영 밀양박씨해백공세일제가지난15일경기도고양시두응촌묘역에서봉행된가운데참례한종 원들이함께하고있다. 호서지방에 세거지를 정한 후 지역의 토호성씨로 추앙받는 충주박씨 문중의 시향이음력10월을맞아곳곳에서봉행 되었다. ‘코로나19’로 인해 각 문중에서 궐향하고있는데반해이날찾은충주박 씨문중의제향은‘화려함보다는검소하 게하고예(禮)를중시하고,무릇제사를 지냄에그공경함이부족하나예가남는 것은 예가 부족하더라도 공경함이 남는 것만 못하다’라는 예기(禮記)의 글귀를 연상하게한다. 첫날인 15일 영모재 뒤편 추원사에 배향된 관조인 고려부정(高麗副正) 박영(朴英)을 비롯 참의공 휘 진( 풂) 의 아버지인 의랑공(議郞公) 휘 광리 (光理)까지 八世 先祖의 제향을 무남 (武男) 원로종친이 직일을 맡아 주관 하여 각 제관이 소임을 다하면서 예 (禮)와 경(敬)을 실천한 가운데 장소 를 참의공 묘역으로 이동하여 기충 (箕豊) 집례의 창홀에 따라 계원(啓 遠), 희배(熙培), 용하(容夏) 종친이 초·아·종헌관으로 헌작하고 경석(慶 錫)축관이 독축했으며, 좌집사 우숙 (愚淑) 우집사 경석(慶錫) 진설 희돈 (熙墩),산신제관 희배(熙培)산신 축 경석(慶錫) 종친이 각각 소임을 다하 면서질서정연하게제례를봉행했다. 참의공이 현 대전 도마동에 입향한 지는 600여년이 지난 일이다. 고려 말 사헌부감찰을 거쳐 진해 직산 감무를 지냈던 참의공께서 은산군사를 역임 한 동 생 판 서 공 (휘 蘇 )와 함 께 어 지 러 움을 피하여 충청도 덕진현 가장골 (현 대전광역시 서구 도마동)로 은거 하여살게된것이다. 참의공의휘는진( 풂 ),관조 휘 영(英) 의9세(世)로개성소윤을역임하고사복 시정에 증직된 휘 광리(光理)와 합천이 씨(陜川李氏)의아들삼형제중둘째로1 366년(공민왕丙午)에태어났다. 진사 (進士)가 되 어 나 라가 어 지러 움 을 알 고 공 명의 뜻을 버 리고 덕진 현 유 성리에 은거(隱居)하여 후학을 가르치 며여생을유유자적(悠悠自適)하다조 선조에 이르러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 고, 이어 진해·직산감무가 되어 많은 치적을 남기고 1422년(세종 4,壬寅)년 에 하 세하 니 향년 57세 로 손 자 형 무(衡 武)의 귀(貴)로 인하여 병조참의(兵曹 參議)에 추증되었으며, 본리(本里) 도 솔봉(兜率峯) 아래 신좌원(辛 坐原)에 예장(禮葬)되고, 참의공파(參議公派) 의문호를열었다. 부인 보안임씨(保安林氏)와의 사이 에아들넷을두었으니효함(孝誠)충함 (忠誠) 제함(悌誠) 신함(信誠)으로 문 중은크게번성하였다.동생소(蘇)는인 흥(仁興),례흥(禮興), 신흥(信興), 지흥 (智興), 신흥(信興) 등 5형제를 두고 이 들 이름을 효제충신과 오상(五常)의 근 본이 되는 인의예지신으로 하여 가문의 내역을엿볼수있으며,忠孝를傳해가고 敦睦을 지켜가자는 뜻의 가전충효 세수 돈목(家傳忠孝 世守敦睦)의 여덟자 가 훈(家訓)은깊이새겨간직할만한하다. 다음날인 16일에는 참의공의 동생 판서공휘 소(蘇)와그의아드님인흥 (仁興), 례흥(禮興), 신흥(信興) 등 사부자(四父子)의 시향이 대전시 문 지동의영사암에서봉행되었다. 충주박씨 시향봉행,추원사·참의공·강릉공 11.15-16.‘코로나19’참례범위축소하고정성은가득 충주박씨 참의공의 장남으로 애민 정신으로 백성을 다스려온 청간재 강 릉공 박효함 선생의 시향이 지난 16 일(음10.2) 대덕구 삼정동의 묘소에 서 있었다. 이날 제향은 선대조 참의 공의 제향과 같이 제관만 참석한 가 운데 17대손 재원 종친이 헌작하고 계역종친의독축으로진행되었다. 강릉공은 나면서부터 남보다 뛰어나 고 전신과 기운이 호쾌하고 시원시원하 여 청렴강직하다. 세종 경술년(1430) 가 을 보령에 해구(海寇)가 침입하여 걱정 거리임에도 적임자가 없었으나 청백함 으로 선발되어 부임즉시 순찰사 최윤덕 과 감사 박안신(밀양인 규정공 后)으로 더불어 함께 성 동쪽 일리(一里) 지점 당 산(唐山) 남쪽을 살펴 면밀한 계획으로 몇 달 되지 않아 축성을 마치니 백성이 별로힘들이지않고도적이자취를감췄 다.청주목사시절에는 투철한애민정신 으로농사일에적극관장하면서그명성 이 이어져 세종 26년 갑자(1444) 9월 21 일(병신) 옷 한 벌을 내려보내 치사(致 辭)했다. 이 같은 사실이 조선왕조실록 과동국여지승람에전해지고있다. 청주목사 임기를 마친 후 첨추(僉 樞 ) 가 되 었 고 또 얼 마 후 나 아 가 서 강 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가 되 어그일화를소개해본다. 강릉은 관동의 큰 도시로 창고와 집이 즐비한데 주민의 실수로 화재가 발생해 불길이매섭고바람도억세어많은피해 가 예상되었다. 이때 강릉공 “내가 덕정 (德政)을이루지못해 이런재난이일어 나니 백성은 무슨 죄인고? 옛날 강릉은 바람이 역(逆)으로 불어 불길을 잡았는 데지금의강릉은바람이불을재촉하니 내가 유곤(劉昆,후한 등혼 사람으로 해 마다화재가일어나자머리를치면비가 오고 바람이 그치곤 했다.)에게 부끄럽 지않은가?”하고말을마치자바람이그 치고불이꺼져강릉의고사하나가되었 는데이는청백함으로고을을다스린것 에서기인되었다할것이다. 이날제향은같은장소에함께모셔진 아들 원직(原直)과 원창(原昌)의 제향 도함께봉행되었다.차남원창 은충주박 씨의최초의족보성화보(대전시지정유 형문화제 제46호)를 만들었는데, 이는 안동권씨의성화보보다3년이빠르다. 강릉공 묘소 앞에 세워진 신도비는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 년간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 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 의 기틀을 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던 서거정(徐居正, 1420 -1488)이 지었다. 비의 전면 대자는 ‘有名朝鮮 嘉善大夫 行 江陵都護府使 贈 吏曹參判 忠州朴公孝咸神道碑銘 幷字’라고 새겨져 있으며 대전시 비 지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으며 충주 호 둘 레 길 에 자 리 하 고 있 어 뭇 사 람 들 의발길을잡는다. 청백리 박효함 선생 추모제향 충주박씨 강릉공파 녹봉 밖에는 취하지 않은 선조의 삶기려 청백리 강릉공의시향이지난16일봉행되었다. (사진좌측신도비는 당대의최고문장가서거 정이비문을지었다.)